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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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9-12-20 수정일 : 2024-04-19 작성자 : 테스트 (test@test.com)

유래

강성(姜姓)의 연원(淵源)

강(姜)이라는 성(姓)을 갖게된 유래(由來)는 삼황(三皇)의 한 분인 염제(炎帝) 신농(神農)으로부터 始作되었다. 사미천이 쓴 사기(史記)에 의하면 염제의 부(父)는 소전(小典) 부락 군주(君主)요(少典部落君主). 어머니는 제후(諸侯) 유교(有嬌)씨의 딸(女)로 이름은 규임기(叫任己) 또는 안등(安登)이다.(諸侯有嬌氏又媧氏之女名叫任己又名女安登)

염제는 화양(華陽:中國 浹西省 華山) 석실(石室)에서 단군기원(檀君紀元)전(前) 884년(BC 3217년, 癸未年) 4월 26일 소전의 장자(長子)로 탄강(誕降)하셨다. 이름은 괴외 또는 궤(魁隗又軌)이고 외모(外貌)는 몸은 사람이지만 머리는 소와 같이 생겼다(人身牛首).

염제께서 외가(外家)인 강수(姜水:中國 浹西省 岐水)에서 성장하셨다. 강(姜)이라는 성(姓)은 염제께서 성장하신 강수(姜水)라는 지명에서 강(姜)을 성(姓)으로 하였다. 그 후 5000여년 동안 강을 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史實)들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해보면 강성은 염제 신농씨의 외가인 강수의 이름에서 딴 것으로써 모계(母系) 중심사회에서 부계(父系) 중심사회로 전환할 때 자식의 성을 어머니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사려된다. 이 같은 사례는 삼황오제를 득성씨조로 하는 태호(太昊) 복희(伏羲)씨의 풍씨(豊氏), 황제(黃帝) 헌원(軒轅)씨의 희씨(姬氏), 순(舜)임금의 요씨(姚氏)에서도 이러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姜 字의 연원(淵源)

姜 자는 강수의 땅 모양(地形)을 문자화 한 글자로 八王女를 가로로 붙인(合字) 글자이다. 발음은 강(居良切)이요 훈(訓)은 성 강(姓姜), 천(川)이름 강, 강(强)할 강, 제비(帝妃) 강, 제비(齊妃) 강 등으로 부르며 그 이유(理由)는 다음과 같다.

성(姓) 강 : 염제신농씨의 후손들이 강을 성으로 정하여 사용하기 때문이다.

천(川)이름 강 : 강수라는 내(川)의 이름에서 연유(緣由)되었다는 뜻이다.

강(强)할 강 : 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성품이 강직하기 때문이다.

제비(帝妃) 강 : 제(帝) 곡(嚳)의 비(妃)로 후직(後稷)의 어머니인 강원(姜嫄)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제비(齊妃) 강 : 제(齊)나라 강태공(姜太公)의 차녀(次女) 읍강(邑姜)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후(后)가 된 후 많은 비(妃)가 齊나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염제(炎帝) 후손으로 현재까지 파생한 성씨의 수가 252개 성씨나 된다. 득성(得姓) 과정을 고찰해보면 그 연원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 내용을 종합해 공통점 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① 황제의 이름을 따서 성씨로 한 사례

② 나라의 국명을 따서 성씨로 한 사례

③ 지명의 이름을 성으로 한 경우

④ 제후국의 이름을 따서 성으로 한 것

⑤ 사람의 이름을 따서 성으로 한 경우

⑥ 시호(諡號)를 성으로 한 경우

⑦ 씨족의 이름을 따서 성으로 한 경우,

⑧ 관직의 이름을 성으로 한 경우,

⑨ 읍의 이름(邑名)을 성으로 한 경우

⑩ 자(字)를 성으로 한 경우,

⑪ 이름의 다음 자를 성으로 한 경우

⑫ 조합(組合)해서 성으로 한 경우

⑬ 풀(草)이름을 성으로 한 경우 등이 있었다.

강성(姜姓)의 연원도(淵源圖)

강성(姜姓)의 득관(得貫) 연원

강(姜)씨 성(姓)의 관향(貫鄕)은 득성 과정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득성 후에 다른 성(姓)으로 분성(分姓)되기도 하고, 같은 성(姓)이라도 관향을 얻어 다른 관향으로 분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혈연관계(血緣關係)는 영구불변 사항이지만 姓과 관향은 가변적 사항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성씨(姓氏)와 관향(貫鄕)을 동시에 고찰하는 것이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먼저 소개한다.

ㅇ 강수(姜水) 또는 기수(岐水) 강성

강수(姜水) 또는 기수(岐水)강씨는 염제(炎帝) 신농(神農)씨께서 화산(華山) 신룡동(神龍洞) 석실(石室)에서 탄강(誕降)하시여 어머니의 고향(외가)인 강수(姜水)에서 성장(成長)하셨다. 그래서 강수(姜水)에서 강(姜)을 姓으로, 강수(姜水)를 관향으로 사용하였다.

염제의 장자 계통이 혈계는 반만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강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다른 후손들은 252개 성씨로 파성(派姓)되어 있다.

강수 또는 기수 관향은 태공의 후손이 아닌 강씨 성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강수, 기수를 관향으로 사용하고 있다.

ㅇ 위수(渭水) 강성

위수 강성은 염제 이후 2007년이 지난 BC 1210년 태공(太公) 자아(子牙)께서 주나라 무왕의 스승이 되어 은나라(殷)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워 제국공(齊國公)으로 피봉되었다. 태공의 후손들이 태공이 천하통일 책략을 구상하면서 낚시와 도계(屠鷄)를 하면서 세월을 기다리며 은거했었던 위수(渭水)를 관향으로 삼았다. 태공이 공작의 작위를 받아도 다른 성으로 사성(賜姓)되지 않는 것은 태공이 염제의 장손으로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위수의 관향은 촉한(蜀漢) 진서대장군 평양후(平襄候) 강유(姜維)의 후손들을 제외한 태공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위수를 관향으로 사용하고 있다.

ㅇ 천수(天水) 강성

천수강성는 태공으로부터 1413년이 지난 서기 203년 촉한(蜀漢)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강유(姜維)께서 평양후(平襄候)로 피봉되면서부터 그 후손들이 천수(天水)를 관향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양후(平襄侯) 후손들이 언제 한반도(韓半島)에 귀화(歸化)하여 정착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중국 오호(五胡)의 혼란기(混亂期)에 한반도로 이거(移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에 정착한 강성의 후손들은 고려초기까지 중국의 관향인 천수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고려 중엽에 이르러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의 후손들은 진주를 관향으로, 신라(新羅) 집사성(執事省) 시랑(侍郞) 강여청(姜餘淸)의 후손들은 금천(衿川)을 관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금천․시흥강씨의 연원(淵源)

금천․시흥강씨는 신라 집사성(執事省) 시랑(侍郞) 강여청(姜餘淸)을 시조로 모시는 성본(姓本)이다. 금천을 관향을 정한 연원은 강여청의 현손(玄孫) 강궁진(姜弓珍)이 약관의 나이로 고려 태조 왕건에 출사하여 고려의 개국과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업을 도운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여후(呂侯)에 봉작(封爵)되고 금천(衿川)을 관향으로 하사(下賜)받아 명법에 따라 삼한벽상공신공의 고조(高祖)이신 신라 집사성(執事省) 시랑(侍郞) 시(諡)충익공(忠翊公) 강여청(姜餘淸)을 시조로 모셨다.

금천(衿川)을 사관(賜貫)받게 된 배경은 신라 집사성 시랑 강여청께서 신라 왕족들이 왕권을 탈취하려는 살육적(殺戮的)인 정쟁(政爭)에 염증을 느껴 서기 840년 신라로부터 선조(先祖)의 목민지(牧民地)인 검주(黔州)로 이거(移居)하여 살게 되었다.

강여청의 후손들은 대대(代代)로 금주지방의 호족으로 살면서 그 명성을 이어왔고, 궁예(弓裔)가 태봉(泰封)국을 세우고 그 영역(領域)을 넓히는 과정에 그들의 영역에 흡수되었다. 궁예가 교만하고 잔학하여 군왕으로서 덕을 갖추지 못함을 자각하여 창의(倡義) 사공신(四功臣)이 반정(反正)을 주도하여 궁예를 추방하고 왕건을 새로운 군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할 때 강궁진께서 약관의 나이로 왕건에 출사하여 고려의 개국과 삼한일통(三韓一統)에 많은 공을 세워 관(官)은 병마원수(兵馬元帥) 판문하사(判門下事)에 이르렀다. 고려 태조 23年 서기941년 12월에 강궁진께서 삼한벽상공신 여후로 봉작되었고 시호는 장렬(莊烈)이며, 금천(衿川)을 관향으로 하사받아 명법(明法)에 따라 삼한벽상공신공의 고조(高祖)이신 신라 집사성 시랑 시(諡) 충익공 강여청을 시조로 모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충익공이 신라로부터 금주로 이거(移居)한 설에는 경북 김천시 개령면과 경남 진주시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정확하게 고증할 방법은 없다. 다만 금천강씨대종회는 진주지(晉州志) 인물록에 강감찬(姜邯贊)이 기록되어 있는 증빙보다 삶의 근거지인 봉토(封土)가 소재한 개령(開寧)을 선대의 유지(遺地)로 보고 있다.

금천․시흥강씨 사람들은 품성이 곧고 강직해 직언(直言)을 잘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남으로부터 시기(猜忌)와 모함(謀陷)의 대상이 되어 화(禍)를 많이 입은 성본이다. 특히 세종조에 태종 이방원이 외척(外戚)을 제거하기 위해 강상인옥사(姜尙仁獄事)를 일으켜 34년간, 인조조에 강빈옥사(姜嬪獄事)로 멸문지참화(滅門之慘禍)를 당해 74년 간 가문(家門)의 단절로 인해 금천강성의 역사(歷史)와 유물, 유적, 사적 등은 완전히 파괴되고 존재하지 않고, 현재 남아 있는 유적 및 사적들은 숙종(肅宗) 무술년 서기 1718년 신원(伸寃)된 이후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옥사로 인해 금천강성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타성(他姓)이나 타관(他貫)으로 전적(轉籍)하고 현재 금천․시흥을 관향으로 지키는 종친(宗親)들은 2000년 인구조사에서 817가구 2,490명이 전국에 산거(散居)하는 소(小) 성본(姓本)으로 광명시 노온사동 아방리와 대구광역시 북구 관음동 양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삼국시대

강여청(姜餘淸)(790~856):시(諡) 충익(忠翊), 신라국 집사성시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