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신묘사행(辛卯使行) 조선통신사 (朝鮮通信使) 제술관(製述官) 동곽(東郭) 이현(李礥)

작성일 : 2018-02-01 23:18 수정일 : 2018-02-02 10:59

이현(李礥, 1653년 10월 21일 ~ 1718년 7월 5일)은 조선후기(朝鮮後期)의 문신(文臣). 본관(本貫) 안악이씨(安岳李氏). 자(字)는 중숙(重叔) 호(號)는 동곽(東郭).


1653년_계사년(癸巳年) 10월 21일 아버지 음성현감(陰城縣監) 이경룡(李慶龍)과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사이에 서자(庶子)로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에서 태어났다.

1694년(숙종20년) 별시 문과 병과 장원 급제 및 1697년(숙종 23년) 중시 문과 병과 장원 급제하였다.

1697년(숙종23년) 1월 28일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호조좌랑(戶曹佐郞) 관직(官職)을 제수(除授) 받았으나 서자신분(庶子身分)으로 관직을 제수 받은 것에 대한 일부 신하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1968년(숙종25년) 4월 9일 황해도(黃海道) 재령군수(載寧郡守)를 관직(官職)을 제수(除授) 받았으나 5월 2일 하직하였다 .

1711년(숙종37)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의 습직(襲職)을 축하(祝賀)하기 위해 8차 신묘사행(辛卯使行)_(1711년 5월 15일~1712년 3월 9일)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任命)되어 왜국(倭國)에 다녀왔으며 탈중화(脫中華)와 천기론(天機論)을 주장했다.

신묘사행(辛卯使行)시 왜국(倭國)의 문사(文士)들과 나누었던 시(詩)와 필담(筆談)이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관악필담(觀樂筆譚)‧광릉문사록(廣陵問槎錄). 남도왜한필어창화(藍島倭韓筆語唱和).양동창화록(兩東唱和錄).양동창화속록(兩東唱和續錄)‧한객증답별집(韓客贈答別集).한객사장(韓客詞章).한객수창록(韓客酬唱錄)‧한객창화집(韓客唱和集).신묘화한창수(辛卯和韓唱酬)‧일광산팔경시집(日光山八景詩集)‧사객통통집(槎客通筒集).상한의담(桑韓醫談).상한창수집(桑韓唱酬集).상한훈지집(桑韓塤篪集).봉도유주(蓬島遺珠).선린풍아후편(善隣風雅後篇).한객증답별집(韓客贈答別集).화한창화록(和韓唱和錄).장문계갑문차(長門癸甲問槎).정덕화한집(正德和韓集).삼택창명조선통신사일행문필담집(三宅滄溟朝鮮通信使一行文筆談集).신묘창수시(辛卯唱酬詩).신묘한객증답(辛卯韓客贈答).신묘화한창수(辛卯和韓唱酬).신묘한인내빙미양창화록(辛卯韓人來聘尾陽倡和錄).한사창수록(韓使唱酬錄).''' 등에 수록되어 남아 있다.

문집(文集)으로 동곽문집(東郭文集) 6권을 남겼으나 총6권중 제5권이 6.25동란시 분실되어 현재 5권만 남아있다.
 
외가(外家)는 한산이씨(韓山李氏)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가문(家門)이며 임진란(壬辰亂) 때의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가 외증조부(外曾祖父)이고 외조부(外祖父)인 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은 호당(湖堂)에 선발(選拔)되었던 학자(學者)로 인조(仁祖) 때 일광산(日光山)의 동조묘(東照廟)에 기제(寄題)의 시(詩)를 지었다.

장인(丈人)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장모(丈母)는 덕수이씨(德水李氏)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서녀(庶女)이다.

노년(老年)에 나주정씨(羅州丁氏) 가문(家門) 친구(親舊)의 권유(勸誘)로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부론면(富論面) 법천리(法泉里) 개치(開峙)에 새 터를 잡고 살다가 1718년_무술년(戊戌年) 7월 5일 여생(餘生)을 마감하였고 원주(原州)에서 선산(先山)인 충청북도(忠淸北道) 괴산군(槐山郡) 불정면(佛頂面) 지장리(芝莊里) 목현(木峴)까지 가는데 당시 보름이 걸렸다고 한다. 그의 후손들이 강원도 원주에 뿌리를 내리게된 계기로 해마다 안악이씨 동곽공현파 원주종중에 11월 2주에 괴산에서 제향을 모신다.

조선후기(朝鮮後期)의 문신(文臣). 본관(本貫)은 안악(安岳). 자는 중숙(重叔), 호는 동곽(東郭). 1694년 41세 때 갑술(甲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문과(文科)에 합격(合格)하였고,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1711년 정사조태억(趙泰億) ∙ 부사 임수간(任守幹) ∙ 종사관 이방언(李邦彦) 등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일행(一行)이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의 습직(襲職)을 축하(祝賀)하기 위해 왜국(倭國)을 방문(訪問)하였을 때, 제술관(製述官)으로서 사행(使行)에 참여(參與)하였다. 사행(使行) 중 홍순연(洪舜衍) ∙ 엄한중(嚴漢重) ∙ 남성중(南聖重) 등 삼서기와 함께 야마가타 슈난(山縣周南) ∙ 기타오 슌린(北尾春倫) ∙ 벳슈 소엔(別宗祖緣) ∙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 하야시 호코(林鳳岡) 부자 등 수많은 일본 일본문사들을 만나 교유하였고, 이때 주고받은 시(詩)와 필담(筆談) 등이 계림창화집(鷄林唱和集)‧양동창화록(兩東唱和錄)‧한객증답별집(韓客贈答別集)‧신묘화한창수(辛卯和韓唱酬)‧일광산팔경시집(日光山八景詩集)‧사객통통집(槎客通筒集) 등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1682년 통신사행 때 홍세태(洪世泰)와 히토미 유겐(人見友元)과의 미담(美談)은 상당히 유명(有名)하다. 필담(筆談)의 자리에서 히토미 유겐(人見友元)은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가 그린 한강조설도(寒江釣雪圖)를 증정했다. 창랑(滄浪) 홍세태(洪世泰)는 그 그림을 가지고 돌아와 애지중지(愛之重之)하였다. 10년후 히토미 유겐(人見友元)은 이미 죽었는데, 그 사실을 모르던 홍세태(洪世泰)는 1711년 신묘사행(辛卯使行)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정사 조태억(趙泰億)의 제술관(製述官)으로 떠나는 이현(李礥)에게 히토미 유겐(人見友元)에게 보내는 편지(便紙)를 부탁(付託)하였다. 이현(李礥)이 에도(江戸)에 머물 때 창랑(滄浪) 홍세태(洪世泰)의 편지(便紙)를 히토미 유겐(人見友元)의 아들에게 전하자, 히토미 유겐(人見友元)의 아들은 홍세태(洪世泰)에게 회신(回信)을 하였다. 글중에는 “편지(便紙)를 보니 망부(亡父)에게 보낸 것으로, 정상이 현연(顯然)하여 일환(一歡) 일비(一悲)를 어찌할 바 몰랐다.” 라는 감회(感懷)가 적혀 있었다. 그래서 조선(朝鮮)과 왜국(倭國) 양국(兩國)의 문인(文人)들 사이에서 미담(美談)으로 크게 알려졌다.


2. 1711년 신묘사행(辛卯使行)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제술관(製述官) 동곽(東郭) 이현(李礥)의 탈중화(脫中華)와 천기론(天機論)  (18세기 조선 통신사 제술관 및 서기의 문학세계  - 김경숙 - 중 발췌 )


동곽(東郭) 이현(李礥)이 1711년  10월 17일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렀을 때 아메노모리 혼슈(雨森芳洲)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시집(詩集)을 보여주고 서발(序跋)을 구하자 서문(序文)을 써주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만한 내용이 있다.


세상에서 사람을 논하기를 안밖으로 하고 시(詩)를 평(評)하기를 고금(古今)으로 하는 자들은 모두 한 변두리에 낙척한 것이지 달론이 아니다. 땅으로서야 밖과 안으로 고루하지만 밖으로 안를 보면 안 또한 밖이다. 세상으로서야 지금이 진실로 옛날에 미치지 못하지만 뒤에 지금을 본다면 지금도 또한 옛날이다. 어찌 안이 귀하고 밖으론 천하고 옛날이 영화롭고 지금이 더럽겠는가?


이는 물론 조선(朝鮮)을 안로 보고 왜국(倭國)을 밖으로 봐서 동방(東邦)의 변두리에 처한 왜국(倭國)문사(文士)들에게 용기(勇氣)
를 주기 위한 것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이를 한번 더 생각해본다면 중국(中國)과 조선(朝鮮)의 관계에서도 같은 맥락이 된다. 중국(中國)이 안이고 중심(中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서를 준 것이다.


동곽(東郭)의 경우 이런 시를 많이 지었다. 예로 <차봉감의소년(次奉勘宜少年)>에서


休言千里不同風         천리에 바람이 같지 않다고 말하지 마오
文敎何曾限日東         문교가 어찌 일찍이 일동에 경계를 지었으리요
持贈淸詩知有意         맑은 시를 가져와 주니 뜻 있음을 알아
老夫肝膽自相通         노부의 간담이 절로 상통하네


라고 하여 왜국(倭國)에도 중국(中國)이나 조선(朝鮮)과 같은 바람이 불고 있음을 말했는데 이는 독자성 혹은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양동창화록(兩東唱和錄)에 나오는 동곽(東郭)의 창화시(唱和詩)의 특성(特性) 가운데 하나는 노부(老夫)로서 왜인(倭人)들을 포용(包容)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동창화록(兩東唱和錄).상한창수집(桑韓唱酬集).상한훈지집(桑韓塤篪集).봉도유주(蓬島遺珠).선린풍아후편(善隣風雅後篇).화한창화록(和韓唱和錄).장문계갑문차(長門癸甲問槎)


등의 창화집(唱和集)에 나타난 다른 제술관(製述官)과 서기(書記)의 시(詩)들에 비해 양동창화록(兩東唱和錄)에서 동곽(東郭)은 왜인(倭人)들의 시재(詩才)를 인정해주는 시(詩)를 매우 많이 짓고 있다.
양동창화록(兩東唱和錄)은 上,下권으로 되어있는데 上권만하더라도 동곽(東郭)의 시(詩)28수 가운데 10수 시(詩)가 그러하다. 예로써,


看君麗藻鏗金石      그대의 아름다운 시가 쨍그렁 울림을 보니
赤幟天東認大鳴      적치가 하늘 동쪽에서 크게 울음 알겠네


海邦多俊傑          바다 나라에 준걸이 많아
家塾闡文章          글방에서 문장을 밝히네
氣奪松篁秀          기는 소나무와 대의 빼어남을 뺏었고
詩偸橘柚香          시는 귤과 유자의 향기를 뛰어 넘었네


詩仙秀句鏗金玉       시선의 빼어난 구절은 땡그랑 소리 나니
認是天東拔萃才       하늘 동쪽의 뛰어난 재주임을 알겠네


麗藻翻驚寄我來       화려한 문장이 날아 놀랍게도 내게 부쳐오니
客懷還似對君開       객회는 그대를 대하여 열린듯 하네'''


淸詩遙寄病夫來        맑은 시 멀리 병부에게 부쳐 오니
珍重琅函手自開        진중한 편지를 손으로 스스로 여네
最感新知多厚義        새로 사귄 이가 후의가 많음이 가장 잘 느껴지니
不徒詞翰有奇才        다만 사한에 기재 있는 것뿐만이 아니네


라고 하였는데 이는 58세란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서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왜인(倭人)들을 포용하려는 생각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또한 이는 내외(內外), 신분(身分)의 상하(上下) 그리고 중화(中華) 소중화(小中華) 변방(邊方) 왜국(倭國)이 모두 중요(重要)하다는 생각에서 가능했을 것인데 이 바탕에는 자신이 고국(故國)에서 겪는 신분적(身分的) 질곡에 대한 갈등(葛藤)이 놓여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곽(東郭)은 왜인(倭人)들의 시재(詩才)를 인정(認定)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동곽(東郭)은 같은 해 12월 하순에 기온 난카이(祗園南海)의 시집(詩集)인 백옥시고(伯玉詩稿)에 써준 서문(序文)에서는


시(詩)를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천기(天機)를 말한다. 천기(天機)란 재(才)를 이름이 아닌가? 나누어 말한다면 재(才)는 나로부터 나오고 천기(天機)는 시상(詩上)에 나아가 얻으니 갈려서 둘인 것과 같다. 반드시 재(才)가 있은 후(後)에 천기(天機)에 능(能)하니 천기(天機)는 시(詩)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재(才)에 있을진저. 이른바 재(才)는 시(詩)에서 구(求)할 필요(必要)가 없고 반드시 용모(容貌) 언어(言語) 기거(基居) 동작(動作)의 사이에서 발동(發動)하여 스스로 숨기지 않으니 어찌 조풍영월(嘲風詠月)을 기다린 후(後)에야 알겠는가?


라 하여 사람 자체(自體)의 품성(品性)에서 자연적(自然的)으로 우러나오는 시(詩)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치지 않고 사람이 자연발생적(自然發生的)으로 읊는 시(詩)를 중요하게 본 것인데,
이는 1712년 창랑(滄浪)홍세태(洪世泰)가 주장한 천기론(天機論)보다 1년 앞선 것이다. 또한 동곽(東郭)은


吾行不是耽遊賞        내가 온 것은 명승유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採得風謠奏聖朝        풍요를 채집해다 성조에 아뢰려는 것이네


라고 하여 민간의 노래에 대한 관심도 나타내고 있다. 동곽(東郭)이 풍요(風謠)를 얼마나 채집했는지는 혹은 이러한 생각이 그의 시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는 현재 그의 문집(文集)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동곽문집(東郭文集) 6권을 남겼으나 총6권중 제5권이 6.25동란시 분실되어 현재 5권만 소장중이다)
그러나 동곽(東郭)이 풍요(風謠)에 관심을 두었다는데 일차적 의의를 둘 수 있겠고 58세란 고령으로 볼 때 왜국(倭國)에 가기 전 조선(朝鮮)에서도 이미 이러한 생각이 있었으리라 추정해본다
.

#안악이씨 #동곽 #조선통신사 #천기론 #제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