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고부이씨 제주입도조

작성일 : 2017-11-23 16:55

제주도에는 . . 夫 三姓을 제외하고는 외부에서 피란, 피신, 유배, 은거 등으로 유입된 자의 후손으로 24만 여 세대에 61만 여 명이 살고 있다.

고부이씨 벽동공파 입도조는 유배자 중 일원이다. 공의 휘는 세 번(世蕃)이요. 호는 백산(白山)이며, 관은 고부(古阜)이고 관직은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이다.

상계는 고려 문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문종25(1071) 민관시랑 김제(金悌)와 함께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온 후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에 이르는 고려 중엽의 5대 임금을 섬김으로써 추충보청공신(推忠輔功臣)이 되어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검교좌정승을 역임하셨다.

말년에는 출생하고 성장한 향리 고부 와석동에 은거하며 후진을 교육하시다가 타계하시니 본관을 古阜로 하고 시조가 되셨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시다.


고부이씨는 시조 16세손에서 9계파로 분파되었고, 현재는 19계파 2만 여 명으로 번창하였다. 제주에는 부사공파와 벽동공파가 살고 있다.

고조 휘 문수(文守)는 평양 서윤(庶尹)이고, 증조 휘 삭()과 조 휘 원소(元蘇) 양대 모두 시강원 사서로 학덕이 높고 경사에 정통한 학자였다. 시조 18세손이고 벽동군수(碧潼郡守) 겸 병마첨절제사 휘 정()의 자로 성종 13(1482)에 출생하였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정암 조광조와 함께 한훤당 김광필 문하에서 수학, 성리학과 경사에 밝았고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강직하셨다.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돈독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직하고 강직한 지조를 지켜 생활화하니 명경행의(明經行義)의 선비로 유림의 추앙을 받았고, 임금에게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 대쪽같은 지절을 지켰다


중중 8(1513)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정(學正)을 시발로 이조. 형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 요직을 거쳐 의금부 도사가 되었. 이무렵 중종의 신임을 얻은 사림파의 소장학자 정암 조광조는 유교로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이상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새로 등정한 것이 현량과의 실시였다. 이에 남곤, 심정 등 훈구파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중중 14(1519)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기묘사화가 터지고 말았다. 이 기묘사화는 주자학에 의거하여 종전의 제도를 과감히 뜯어 고치려던 조광조, 김정(金淨, 제주 오현인), 김식(金湜), 이세번 선조(李世蕃 先祖) 등 곧은 선비들을 귀양을 보내거나 사사함으로써 유학이 쇠퇴하고 기강이 문란해지는 등 그 후유증이 컸다.

이 때 의금부 도사로 있던 李世蕃 선조께서는 동문인 조광조를 비롯한 어진 선비들이 화를 입자 영의정 정광필과 태학 유생들을 일으켜 세워 그들이 무죄함을 탄원하기에 이르렀으나 조광조의 일당으로 몰려 제주에 유배(중종 15, 1520)되었다. 


한창 일할 나이인 38세 때 사화에 휘말려 정치에 환멸을 느낀 李世蕃 선조께서는 후진을 가르치고 백성을 교화하는데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제주에 류배올 때 경서와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정착지인 대정(大靜)에서 독서와 강학으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면서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예절을 계몽하는 등 제주 유생교육에 헌신하시다가 적거(謫居) 7년만에 대정 류배지에서 중종 21(1526)에 타계하니 향수가 44세이다


귀양살이의 고독과 인생의 덧없음과 고향에 대한 뼈저린 향수가 선조의 단명을 재촉했다 하겠다. 유배 7년간에 제주 유생들이 국시에 등과하는 자가 많았으며 교화의 힘이 컸고 적거지 대정현의 향품이 크게 진작하는 등 흥학(興學)의 바탕이 되었다.

엄친의 병환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모친을 모시고 내도한 아들 충현(忠賢)은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효험없이 병졸하니 유언에 따라 한경면 고산리 139에 안장하고 친묘만 외로운 섬에 남겨두고 떠날 수 없어 선친의 종생지인 대정현에 정착, 고부이씨 벽동공파 입도조가 되었고, 이 지방을 중심으로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종 원년(1545) 태학생들의 상소로 조광조의 신원과 동시에 이세번 선조할아버님의 관직이 추복되셨다. 장자 충현 조(忠賢 祖)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 유생으로 수학 중이었으며 충의와 예절을 숭상하는 전통적인 선비였다. 15세의 소년으로 등과했던 공은 선친의 유지를 이어 독서와 강학으로 후학을 가르치면서 인재양성에 전념하였다.

세번 할아버님은 류배지에서도 자녀 훈육은 물론 일상생활의 심회를 한시로 주고받고 했던 필사본을 10여 년 전에 발굴했고, 영원히 보존하기위해 묘정에 오석 시비<사진 참조>를 세웠으며, 병풍을 만들어 일상 활용으로 숭조선양하고 있는 그 한시 추야음(秋夜吟)”사친(思親)”을 말미에 기재한다.

이제 우리 고부이씨대종회는 대종회 임원진을 중심으로 똘똘뭉쳐 숭조상문하고 종중의 숙원사업인 대종보 발행, 대종회관 건립과 후진 양성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을 희망하며 우리의 뿌리문화의 이해와 보존에 적극 참여하고 한국성씨총연합회와 연대하여 무궁 번영과 발전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