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조상님

해평윤씨 오음 윤두수

작성일 : 2017-11-23 16:24 수정일 : 2017-11-23 16:48

우리 해평 윤문의 12세조 오음공 윤두수(梧陰公 尹斗壽 1533~1601) 先祖는 조선조 중종 때 군자감정을 지낸 지족암공 윤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당시 석학이었던 청송 (聽松 成守琛 1493(성종 24) ~ 1564(명종 19)]선생과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는데, 23세가 되던 해인 명종 10(1555) 2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11년에는 정시에서 장원급제를 하고 명종 1310월 전시에서 문과(을과)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공은 당대 문단의 거두로 꼽힌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중에도 임진왜란을 평정하는데 대공을 세워 벼슬 품계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올랐다. 그 외에 해원부원군에 봉작되었을 뿐 아니라 문학에 거성으로서 서예와 시문에 능하여 문집으로는 평양지, 연안지, 기자지 그 외에 많은 시집을 남겼다.

명종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양이 그의 아들을 전랑에 천거할 것을 공에게 청하였으나 공은 이에 부당성을 지적하여 그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공은 아무리 권세가 높은 사람의 청이라 할지라도 도리에 맞지 아니하는 일은 한사코 이를 배격하는 고결한 성격을 가진 분이다. 

선조 233월 황윤길을 통신사로 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1월에 도요도미(豊臣秀吉)과 회견하고 조선왕에게 전하는 답서(편지)를 받아가지고 이듬해 3월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때 도요도미(豊臣秀吉)가 통신사 편에 왕에게 올린 답서 내용에는 일본이 명나라를 칠 터이니 조선이 선구(先驅)가 되어 달라는 오만 불손한 말이 들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극비에 붙이고 비밀리에 의논, 처리하려고 어전에서 중신 회의가 열렸는데,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이를 명나라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공()은 알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영의정인 이산, 좌의정 유성룡 등은 일본의 내침이 불확실하다.는 것과 또 이를 알리면 명나라로부터 조선과 일본이 공모를 하고 있다고 의심을 사기 쉽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니, 동인들에 속한 신하들이 이에 찬동을 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사헌인 공은 명나라와는 우방에 대한 의리가 있고 또 만약에 조선이 이를 명나라에 알리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이는 조만간에 명나라가 알게 될 것이니 미리 통보를 하는 것이 가하다고 주장을 하니, 서인들에 속한 신하들이 이에 찬동을 함에 갑론을박으로 결정을 보지 못하고 있던 중 선조 임금께서 공의 의견이 옳다고 말씀하심으로 결국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는 김응남 편에 다만 전해들은 바에 의하여 일본의 정상을 통고 한다는 형식으로 통보를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는 이에 앞서 유구로부터 도요도미가 명나라를 정벌할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미리 듣고 있었다. 또 명나라 사람으로서 일본에 갔다 온 자로부터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바 있어 일본의 동태를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때 만약 이러한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야말로 일본과 조선이 공모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되어 국가의 안위를 그르칠 뻔하였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역시 공의 선견지명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아니할 수 없다.

선조 25(1592) 414일 일본군의 제 118천명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그날로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북상,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러한 난을 갑자기 당하고 보니 중신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만 있었는데, 임금께서는 공의 지혜와 지략이 누구보다도 뛰어남을 주장하시고 귀양에서 석방할 것을 명령하시었다

오음 윤두수 초상


피난길에 임금께서는 개성에 도착 즉시로 공을 어영대장에 임명, 치안을 확보하게 하고, 53일에는 양사의 탄핵으로 영의정 이산해와좌의정 유성룡이 파면되고 그 후임으로 영의정에 최홍원, 좌의정에 공(尹斗壽), 우의정에 유홍이 임명 되었는데, 이때 귀양 갈 때 삭탈되었던 해원군에 다시 봉작되었다.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급보에 접한 선조임금께서는 54일 밤에 개성을 떠나 57일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이항복(李恒福)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려 하였으나 공(斗壽)만일 우리 군의 힘으로 임진강을 지킬 수만 있다면 삼남지방(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과 서북지방(함경도, 평안도, 황해도)에 있는 군사와 의병(義兵)이 합세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무작정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명나라 군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다면, 그 위세와 횡폭이 대단할 것이며 이로 인하여 국가의 큰 화를 초래할 우려가 적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이 원병 문제를 보류하고 있던 중 철석같이 믿었던 임진강의 수비가 무너지고 김명원의 폐전소식이 전해지자, 부득이 512일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게 되었다. 한편 527일 임진강을 건너온 일본군은 개성을 함락시키고, 61일 개성을 출발하여 황해도 안성(安城)역에 이르러 가또기요마사(加藤淸正)는 함경도로 고니시유기나가(小西行長) 등은 평양으로 행군을 시작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오음 유고


일이 이렇게 되자 61일 임금은, 모든 중신들을 불러 이로 부터의 거취 문제를 논의 하게 되었는데(이 회의에는 다시 등용된 鄭澈 柳成龍도 참석)이때 정철, 심충겸 이덕형은 한 대장에게 평양성을 지키게 하고 다른 신하들은 대가(大駕)를 모시고 이 성을 나가는 것이 옳다 고 주장하였는데 공과 유성룡은 이를 반대하여 말하기를, 이는 천만 부당한 말이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남북이 수 천리에 불과한데 갈만한 곳이 어디에 있느냐. 만일 압록강을 건너간다 하더라도 한번 건너가면 그만이지 무슨 계획이 설 수 있겠느냐, 다만 죽어야 마땅한데, 그렇다고 다 죽을 수도 없고 단지 굴욕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니 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평양성은 군사상 방위하기 쉬운 요새지이오니 이곳을 떠나지 말고 지키도록 하옵소서. 이 성중이 다 상감()을 받들고 이성을 사수(死守)하려 하는데, 만약 대가(大駕)가 나가신다면 이 은 사기를 잃어서 일시에 붕괴되고 말 것이옵니다. 하니 교리 이유징, 예조좌랑 박동양이 입을 모아 찬성하고 나섰다. 이때에 선조임금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그 비참한 모습은 신하들로서는 감히 쳐다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 정철이 어전에서 물러나와 공()에게 윤공의 말이 옳기는 하나 오늘의 천안(天顔=임금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소, 어찌 신하로서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있소.하니 공이 목소리를 높여 정공이 어찌하여 이같이 나라를 그릇치는 말씀을 하오, 만일에 한양(서울)에서 일찍이 고수지계(固守至計)를 세우도록 하였다면, 어찌 오늘날 이 모양이 되었겠소, 공이 이성을 지키기를 원하지 않으면 대가를 받들고 혼자 나가시는 것이 가할 것이오, 나 혼자 지키겠오.하니 이말을 들은 정철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 모든 신하들이 눈치 작전으로 왕의 비위를 맞추며 일신상의 요행수만 바라고 있는 이때에, 좌상(左相)인 공()의 이 한마디 말은 과연 대신 중 대신 다운 중천금의 무게 있는 일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임금의 일행은 북행할 것을 결정하고, 평양을 떠나 숙천(肅川)을 거처 612일 안주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전세가 불리하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임금은 13일 밤 신하들을 불러 놓고 다음 피난지를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은 함경도 함흥으로 가자고도 하고 강계로 가자고도 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찰나에, 승지 이국(李國)이 의주로 갔다가 불리하면 요동으로 건너가 내부(內附=偏入)하자고 제의하자, 병조판서 이항복이 적극 지지하고 나섬으로 선조임금은 이 의견을 따라 의주로 가기로 결단을 내리고, 세자 광해군으로 하여금 국사의 대권을 맡기게 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620일 임금이 용천에 이르렀을 때 공은 마음을 가다듬은 후 노상에서 조심스럽게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천조(天朝=明國)에 가시어서 내부(內附)를 호소하려고 하신다함으로 晝夜 겸행으로 급히 달려 여기에 왔아온데,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은 장차 뉘에게 맡기시려고 이러한 경솔한 필부의 행동을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하였다. 선조임금이 부끄러워 머리를 숙인채로 한마디 대답도 못하고, 다만 공()에게 애원하는 눈치만 보이는 것이었으므로, ()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아뢰기를 이미 일이 여기에 이르렀사옵니다만 요동으로 가기위하여 의주로 가실 수는 없아옵니다. 반듯이 인심이 크게 경동할 것이온데 장차 이를 수습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잡고 바다에서 분전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요새 적의 세력이 매우 누그러졌사온즉 의주 등 여러 수령들로 하여금 헤어져 있는 군병들을 다시 수습케 하실 수 있사오니,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뜻을 밝혀 민심을 회유하신 뒤에 서로 믿는 바가 있도록 하실 수도 있지 아니하옵니까! 여기서 2.3일 동안 더 형세를 관망하시다가 천천히 행동을 하신다면, 원근 사람들이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을 것이 온 즉 어찌 재고하시지 않으시겠나이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충군애민의 지성이 흰 머리카락에 서리니, 이때에 공은 참으로 나라의 기둥이고 대들보 같이 보였을 것이다. (하루 동안에 다섯 차례나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임금은 도요내부(渡遼內附)의 뜻을 내 굽히지 아니하고 이미 작성하였던 글을 명나라 조정에 보냈는데, 그 글의 요지(要旨)에 이르기를 궁빈(宮嬪)을 이끌고 요(-지금의 滿洲)로 건너가 상국(上國-명나라)의 영토로편입되어(內附) 복종코저 하오니 원대로 들어주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명나라에서 다음과 같

은 통첩을 선조임금에게 전달해왔다. 국왕은 사직(社稷)을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멀리 나라를 버리고 피하여 온다면, 곧 군민이 이로 인하여 싸울 마음이 없어져 단결이 아니되고 흩어지고 말것이니, 이해의 경중을 살피고 내부(內附)한 다는 도강지계(渡江之計)를 하지말지어다남의 대문을 열어달라고 두드리는 사람과, 이를 열어주지 아니하는 사람, 이 모두가 민망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애당초에 공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러한 굴욕적이고 창피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左議政 尹斗壽는 이 轉役中活動宰臣中에서도 가장 主觀確立되고 右顧左眄으로 의 눈치만 보면서 그 비위를 맞추기에 신경을 쓰던 部類들과는 매우 判異存在로서 自己信念主張을 가진 第一人者였다.


모덕재에서 오음 윤두수 공의 임진 7주갑 사제사를 모시고 나서 <해평윤문 헌관 모습>

참고사항 : 壬辰亂 扈聖 二等功臣 / 光國 二等功臣 / 平難原從 二等功臣 / 衛聖 一等功臣 / 不遷之位를 받으심: 壬辰亂 九功臣(윤두수, 이순신, 송상현, 고경명, 권율, 정곤수, 조헌, 이항복, 유성룡)은 국가에서 매60(임진년)마다 기일에 제사를 받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