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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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1-09 17:15 수정일 : 2018-02-26 21:28

1. 경주배씨의 연원 및 개요(경주배씨유래)

배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로서 뿌리는 멀리 2천여년 전 신라 건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모체인 6부 촌장의 한 분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지금의 경주 명활산 아래 분황사 일대)의 촌장 지타공(祗沱公)이 바로 우리나라 배씨의 득성조(得姓祖)가 된다.

서라벌 6부 촌장들은 모두 천강(天降)하신 신인(神人)으로 기록된 바 있고, 금산가리촌의 영역은 상 ․ 하서지(上 ․ 下西知), 내아(乃兒) 등으로 지금의 동촌이 이에 속하였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배씨 득성조(得姓祖)인 지타공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은 서기 전 69년 임자(壬子) 3월의 어느날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자제들을 거느리고 경주 알천(閼川)가 양산 기슭에서 6부가 한데 뭉쳐 나라를 세울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멀리 나정(蘿井) 숲 사이에서 한 줄기 서광이 하늘을 뻗는지라 달려가 보니 큰 박 같은 알이 있어 쪼개보니 해와 같이 환한 미소년이 나왔다.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 여겨 ‘밝은 누리(朴赫居世)’라 이름짓고 거두어 기르기 13년(서기전 57년 甲子年)에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삼아 6부가 한 나라로 우뚝 서니 국호가 서라벌이요, 신라 천년 왕국의 출발이었다.

금산가리촌의 이름을 바탕으로 그 성격을 상고할 때 ‘금산근어인(金山根於仁) ․ 가리화어의(加利和於義)’이니 시조께서는 백성을 다스림을 인과 의를 바탕으로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신라 태조 3년(서기전 55 丙寅年)에 6부 공신의 위차를 정할 때 지타공은 개국좌명1등원훈총재태사(開國佐命一等元勳冢宰太師)에 이르렀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는 신라 개국의 공을 참작하여 건국의 아버지격인 6부 마을과 촌장에게 마을 이름과 6성(신라6성: 배(裵), 이(李), 최(崔), 정(鄭), 손(孫), 설(薛))이 내려졌다. 금산가리촌은 한지부(지금의 경주)가 됐고, 시조께서는 배씨 성을 받았다. 그때 함께 성을 받은 사람들은 알천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 돌산고허촌장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 취산진지촌장 정지백호(鄭智伯虎), 무산대수촌장 손구례마(孫俱禮馬), 명활산고야촌장 설호진(薛虎珍) 등이시다.

법흥왕 3년(서기 516년)에는 공에게 시호를 문양(文讓)으로 내리셨고, 무열왕 3년(서기 656년)에는 장렬왕(壯烈王)으로 추봉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 건국의 원훈이신 지타공께서 성을 배씨로 받으신 후 우리 조상들은 6두품 귀족으로서 활약하였다. 후손으로 계대가 미상하나 신라 성덕왕 때 상대등이었던 휘(諱) 부(賦)와 희강왕을 추대하는데 1등공신이었던 휘(諱) 훤백(萱伯)과 신라말의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은 역사상 저명하였다.

오늘날 배씨는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을 중시조로 하여 배씨의 갈래로서 같은 세계(世系)를 갖는다.

서기 918년 고려가 건국될 때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께서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와 더불어 후고구려 장군 왕건의 기장으로서 왕 궁예의 폭정에 항거하여 왕건을 도와 태조로 추대하였다. 이에 공신위차(功臣位次)에서 공이 순충분의추대개국정사1등원훈(純忠奮義推戴開國定社一等元勳)에 오르고 대상(大相)으로서 첫 수상이 되었으며 그후 도통(都統)으로서 군사를 총괄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서기 935년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최응과 더불어 통합삼한익찬1등공신(統合三韓翊贊一等功臣)이 되었다.

이에 서기 994년(고려 성종 13) 태묘(太廟)를 처음 세웠을 때 고려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고 서기 1452년에는 고려 태조외에 민족 발전에 공헌한 영걸들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함께 배향할 때 무열공을 수위로 하였다. 그리고 4태사(四太師)로서 태백산성(太白山城)에 향사(享祀)되고 또 철상(鐵像)이 봉안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무열공은 모든 배씨의 중시조(中始祖)로서 이후부터 계대(系代)를 가지게 되었음은 신라사와 동국통감,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정절공 배극렴(貞節公 裵克廉)은 고려에 등제(登第)하여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진주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우왕 2년 동왕 4년에는 3도원수(三道元帥)로 승진하여 경산부(京山府)에서 적군을 격파하였고, 이성계를 도와 시들어가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니 개국1등에 서훈(敍勳), 성산백(星山伯)에 봉작되었으며 첫 영의정이 되니 금산가리촌장 지타공, 무열공 현경, 정절공 극렴 세 분은 세 왕조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모두 수상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이와 같이 배씨는 금산가리촌장이신 문양공 휘 지타를 시조로, 고려개국원훈이신 무열공 휘 현경을 중시조로 모시는 단일혈족이며 정절공 휘 극렴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삼조원훈 명문거족으로 중흥하였으며 2000년도 통계조사에 의하면 115,900세대 372,064명이 전국에 살고 있으며 외국 교포를 포함하면 50만으로 추정한다.


2. ‘裵(배)’와 ‘裴(배)’자의 유래

‘裵’자와 ‘裴’자는 어느쪽이 바르고 어느쪽이 틀린 시비곡직(是非曲直)의 문제가 아니고 꼭 같은 뜻을 가진 같은 글자이니 어느 자로 써도 다 옳다. 그러므로 그중 하나로 통일하여 내외의 오해를 불식하여야할 것이다. 근자에는 배씨 문중에서도 대부분이 ‘裵’자로 쓰고 있고 밖으로 인쇄소, 잡지사, 신문사 등 출판사에서도 ‘裴’자로 된 활자는 찾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1982년에 배씨대종회에서도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裵’자로 통일하기로 의견을 모아 오늘날은 ‘裵’로 쓰고 있다.

‘裵’와 ‘裴’자의 유래에 얽힌 설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조 단군께서 동남방지방 및 남해변을 순시하시고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모실 때 붉은 용 두 마리가 바다에서 솟아나고 하늘에서는 두 선녀가 자주색 함을 받쳐들고 내려와 노닐다가 바닷가에 함을 두고 갔다. 단군께서 이상히 여기시고 그 함을 열어본즉 비의남아(緋衣男兒)가 들어 있었다. 이는 필시 천신께서 지성에 감동되시어 신아를 내려 주셨다고 믿고 양육케 하였다. 15세가 되자 체모가 장대하고 지기가 웅건하였다. 단군께서는 그 신아의 처음 착의가 비의(緋衣)였으므로 ‘緋’자에서 ‘糸’를 빼고 ‘衣’를 부쳐서 성을 ‘裴’로 정하고 이름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천생(天生)이라 명명한 후 배천생공을 남해장에 봉하여 이후 33세 동안 자자손손 세습하게 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또 하나는 조선조 때 배삼익(裵三益)이라는 어른이 계셨는데 자(字)는 여우(汝友)이며 호는 임연재(臨淵齋)로 1534년(중종 29)에 출행하여 1558년(명종 13)에 진사에 합격한 후 성균관 학유를 비롯한 내외직을 역임하면서 1587년(선조 20)에는 중국에 진사사(陳謝使)로 가서 문필로써 외교 역량을 발휘하였고, 1588년(선조 21)에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흉년이던 관내를 순시하다가 순직한 분이다. 바로 이분이 진사에 합격할 때 답안지에 초서로 쓴 성명 3자가 너무나 명필이어서 호명자(呼名者)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삼익(裵三益)’을 ‘쇠지개(衰之蓋)’로 잘못 호명하였는데 뒷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명종 임금이 궁중으로 부르시고 칭찬하신 후 ‘裵’자의 꼭지를 위로 써서 실수가 생겼으니 앞으로는 꼭지를 내려쓰라는 분부가 있어 그로부터 ‘裵’자를 ‘裴’자로 쓰게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한문자전을 보면 ‘裵’자와 ‘裴’자는 같은 자로서 그 뜻은 (1)옷 긴 모양, 옷이 치렁치렁함 (2)천천히 이리저리 거닐음 (3)성(姓) (4)나라 이름 등으로 되어 있고 ‘裴’자는 ‘裵’자의 본자로 되어 있는가 하면 어느 자전에는 ‘裴’자를 ‘裵’자의 고체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3. 경주배씨의 분파(分派)와 본관(本貫)

배씨는 분성(盆城:金海), 성산․성주(星山․星州), 달성(達成), 흥해(興海), 곤산(昆山) 5파 외에 상계소목이 실전된 경주처사공파, 성산복야공파, 화순진사공파 등으로 분파되며,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호적상 본관은 분성, 성산성주, 달성, 흥해, 곤산이 대부분이나 그 외 감해, 개성, 경남, 고령, 고양, 금성, 나주, 남양, 남원, 남해, 대구, 밀양, 상주, 서산, 선산, 수원, 안동, 온양, 의성, 전주, 정주, 진주, 창령, 청산, 청주, 평산, 풍산, 풍성, 해주, 협계, 화순 등 50여개의 본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배씨는 시조인 문양공 휘 지타와 중시조인 무열공 휘 현경의 후손으로서 분파 ․ 분적(分籍)되었으며 각 파의 연원과 현황은 다음과 같다.


경주배씨 분성파(慶州裵氏 盆城派)

파조 및 본관의 유래

분성(盆城)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동부 낙동강(洛東江)의 서안에 위치한 김해(金海)의 고려(高麗)때 지명(地名)으로 본래 가락국(駕洛國)이었는데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법흥왕(法興王) 때 금관국(金官國)이 되었다가 문무왕(文武王)이 소경(小京)을 두었으며 경덕왕(景德王)때 김해(金海)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가 부(府)로 강등시켜 뒤에 임해현(臨海縣)이 되었으나 성종(成宗)때 금주(金州)로 개칭되고 원종조(元宗朝)에 와서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가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때 다시 김해로 고쳐 부(府)로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는 태종(太宗)이 이 곳에다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고, 세조(世祖)때 진(鎭)을 두기도 했으며 고종(高宗) 때 군(郡)으로 승격, 1906년 양산군의 2개면을 병합하고, 1981년 시(市)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분성 배씨(盆城裵氏)는 고려 창업의 일등원훈(一等元勳) 배현경(裵玄慶 ; 중시조)의 6세손인 원룡(元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분성배씨대동보(盆城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사혁(斯革)의 아들 3형제 중 장남으로태어나 고려조(高麗朝) 때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도원수(都元帥)를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분성을 본관(本貫)으로 삼게되었다.

가통(家統)을 이어온 인맥(人脈)으로는 원룡(元龍)의 아들 중 장남 서(署)가 고려조에서 감무어사(監務御史)와 전객령(典客令)을 지냈으며, 손자 단(端)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생원(生員) 윤온(允溫)의 아들 극수(克壽)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며 거문고와 독서(讀書)로 여생을 보냈으며, 윤검(允儉)의 아들 극부(克富)는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며 학문으로 명성을 떨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의 가통을 세웠다.

교수(敎授) 상금(尙錦)의 장남인 문보(文甫)는 세종(世宗)때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쳐 그가 죽자 왕이 제문(祭文)을 내려 공적(功績)을 치하했으며, 직장(直長) 유흥(有興)의 아들 진(縉)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문장과 필법이 탁월(卓越)하여 아들 맹후(孟厚)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1462년(세조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맹후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성종(成宗)때 사신(使臣)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풍(氣風)을 바로잡아 왕으로부터 포상이 내려졌다.

이어 1477년(성종 8) 정유 춘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成宗8. 丁酉 春 司憲府 大司憲 吏曹參判)을 지냈다. 그의 아우 중후(仲厚)는 문장과 도학(道學)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숙후(叔厚)는 연산군(燕山君)때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고, 계후(季厚)는 경주판관(慶州判官)과 칠원현감(漆原縣監)을 거쳐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온후(溫厚)한 성품과 지극한 효성(孝誠)으로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던 학(鶴 ; 용양위 부호군 세즙의 아들)은 벼슬의 뜻을 버리고노천(老泉) 김 식(金 湜)에게 글을 배웠으며 도천(道泉)에다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면서 스스로 호(號)를 임천(林泉)이라 하였다.

문벌(文閥)의 가문에 무맥(武脈)을 형성한 철중(鐵重)은 선조(宣祖)때 무과에 급제하여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거쳐 홍주영장(洪州營將)을 지내고 손가락을 잘라 모친(母親)의 병환에 수혈하여 사림(士林)의 주청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를 지낸 담(湛)은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을 떨쳐 학행(學行)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던 영(渶)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陜)에서 회맹(會盟)했던 원우(元佑)는 전쟁에 나가 무훈(武勳)을 세워 선무이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석학(碩學) 조식(曹植)의 고제(高弟)인 명원(明遠)은 병마 절제사(兵馬節制使)로 성(城)을 지키다가 순절하여, 원종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된 아우 형원(亨遠)과 더불어 의절(義節)의 가맥(家脈)을 지켰다.

광해군(光海君)때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후에 삭직당했던 대유(大維)는 문장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와 오위진결(五衛陳結)을 공부했던 응남(應男)은 임진왜란에 공을 세워 백부(伯父) 원우(元祐)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배향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사오당(四吾堂) 양옥(良玉)이 문장과 행의(行誼)로 추앙을 받았으며, 홍우(弘祐)는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장현광(張顯光)의 휘하에서 희병(羲兵)을 모집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였고, 죽림(竹林)에 정사(精舍)를 세워 후진 양성에 진력했던 동도(東度), 숙종(肅宗)때 효행(孝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던 여경(汝慶), 「심경보사(心經補辭)」의 저자인 일장(一長), 항일투사 동석(東奭) 등과 함께 분성 배씨를 더욱 빛냈다.

2000. 11.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분성․김해배씨(盆城․金海裵氏)는 남한(南韓)에 총 22,564가구 71,268명이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경주배씨조상인물

배 서(裵 署) :고려조에 감무어사(監務御使)․전객령(典客令)을 역임하였다.

배종주(裵宗柱) : 고려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였다.

배 단(裵 端) :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공보(裵公輔) : 고려때 판도사사(版圖司事)․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배정비(裵廷婓) : 호(號)는 귀연(龜淵). 고려때 진사(進仕)였다.

배정미(裵廷亹) : 고려때 진사(進士)였다.

배정현(裵廷顯) : 고려조(高麗朝)에 진사(進士)였다.

배 수(裵 守) : 고려(高麗)때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냈다. 1346년(충목왕2) 이곡(李穀)이 지은 연복사(演福寺) 종명(鐘銘)에 상호군(上護軍) 배천경(裵天慶), 흥해군(興海君) 배전(裵全)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배 찬(裵 襸) : 무창군수(茂昌郡守)에 기용(起用)되어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방어(防禦)하였다.

배 우(裵 櫌) :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배윤손(裵允遜) : 조선에서 부윤(府尹)을 지냈다.

배윤상(裵允祥) : 조선(朝鮮)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배상휘(裵尙輝) : 조선(朝鮮)에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냈다.

배유흥(裵有興) : 조선때 직장(直長)을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배유선(裵有宣) : 조선조(朝鮮朝)에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역임하였다.

배극수(裵克壽) : 호(號)는 송헌(松軒). 천성(天性)이 영민(英敏)하고 독신성학(篤信性學)하였다. 그후 제주 점마차사(濟州點馬差使)에 등용(登用)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영남(嶺南)에서 강진 대곡 평덕리(康津大谷平德里)에 이거하여 송정정사(松亭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양성(養成)하며 거문고와 독서(讀書)로 여생을 보냈다.

배진손(裵晋孫) : 호(號)는 애음(厓陰). 조선때의 학자(學者)로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영산(靈山)에서 청도(淸道) 운문(雲門)으로 이거(移居)하여 도학(道學)을 연구하였다.

배광우(裵光祐) : 자(字)는 이열(而烈). 조선세조(世祖)때 벼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으나 49세에 죽었다.

배극부(裵克富) : 자(字)는 사관(士寬), 호(號)는 둔촌(遯村). 조선때 문장(文章)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도의상교(道義相交)하였으며, 충주(忠州) 불정촌(佛丁村)에 이거(移居)하여 둔적(遁跡), 의(義)를 숭상(崇尙)하였다 하여 호(號)를 둔촌(遯村)이라 하였다.

배 하(裵 夏) : 자(字)는 순거(舜擧), 호(號)는 노은(老隱). 일찍이 벼슬하여 여러 관직(官職)을 거쳐 영동정(令同正)에 이르렀으나 사임하고 산음 봉곡(山陰鳳谷)에 은거(隱居)하여 다시는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 이름을 노은(老隱)이라 하였다.

배문보(裵文甫) : 자(字)는 천장(天章), 호(號)는 세한재(歲寒齋). 정미보 1907년(丁未譜)와 병신보 1956년(丙申譜)에 의하면 1409년 생(生) 을축태종 9년(乙丑太宗9年)~1485년 9월 12일 졸(卒) 을사 성종17년(乙巳成宗17年) 1438년 무오세종20년에 등과(戊午世宗20年에 登科) 세종(世宗)때 관직을 거쳐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였고, 1485년(인종1)에 죽으니 왕(王)이 제문을 내리고 관원(官員)을 보내어 장례(葬禮)를 치르도록 하였다.

배 특(裵 忒) : 조선조(朝鮮朝)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배광한(裵匡漢) : 조선(朝鮮)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배 진(裵 縉) : 조선(朝鮮)때 음보(蔭補)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다. 문장필법(文章筆法)이 탁월(卓越)하였고, 유구생필(遺句生筆)이 전(傳)해온다.

배득호(裵得浩) :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백양덕(裵陽德) : 조선(朝鮮)에서 동정(同正)을 지냈다.

배맹후(裵孟厚) : 1448(세종30)~1478(성종8) 자(字)는 재지(載之), 호(號)는 계당(桂堂). 1462년(세조7) 생진양과장원(生進兩科壯元) 그해 추별시정과급제(秋別試丁科及第) 1463년 계미춘 황감급제(癸未春黃甘及第) 1466년 병술춘 중시장원(丙戌春重試壯元)에 급제한 맹후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475년(성종6)때 사신(史臣)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어 조정의 기풍(氣風)을 바로잡고 옥천곡(玉川谷) 요승(妖僧)을 척결한 척불지공(斥佛之功)으로 청암산 일구급 부근답 복호 20결 상사(靑岩山一區及附近沓復戶 二十結 賞賜) 1477(성종8) 정유춘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丁酉春司憲府大司憲吏曹參判)을 지냈다.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되었다.

배중후(裵仲厚) : 조선조에 일찍이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에 합격했으나 과거(過擧)를 단념하고 학문(學問)을 연마(硏磨), 문장 도학(文章道學)이 뛰어나 당시 사림(士林)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이심원(李深源)․조려(趙旅)․조욱(趙昱) 등과 도의 상교(道義相交)하며 시문(詩文)을 창화(唱和)했다. 내내강사(奈內江舍)의 사운삼수(四韻三首)와 산인혜영(山人慧嶺)의 증시(贈詩) 1수(首)는 특히 유명(有名)하다.

배숙후(裵叔厚) : 호(號)는 백암(白庵).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 경리학(經理學)에 능(能)하였고, 종정(從政)에 뜻이 있어 문과(文科)에 급제, 1489년(성종20)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1494년(성종25)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495년(연산군1) 승예랑(承禮郞) 오수 찰방(鰲樹察訪)을 지냈다.

배계후(裵季厚) : 자(字)는 직방(直方), 호(號)는 모당(慕堂). 1474년(성종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478년(성종9) 경주 판관(慶州判官)이 되고, 1488년(성종19)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거쳐 1491년(성종22)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배이동(裵二仝) : 조선(朝鮮)때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냈다.

배세강(裵世綱) : 호(號)는 영락(永樂). 조선 성종(成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사(全羅都寺)를 지냈다.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복지축실(卜地築室)하니 그 동명(洞名)을 성당(聖塘)이라 하였고, 점산작사(占山作舍)하니 그 정자(亭子)를 영락정(永樂亭)이라 하였다.

배세적(裵世績) : 자(字)는 무숙(懋叔), 호(號)는 정곡(靜谷).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 문장 행의(文章行誼)가 중후(重厚)하였고, 1498년(연산군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봉직랑(奉直郞)으로서 군위(軍威)에 출재(出宰)하였는데 정사(政事)가 청백(淸白)하고 경내(境內)가 화흡(和翕)하였다.

재임중(在任中)에 죽으니 군민(君民)의 애통함이 부모상(父母喪)을 당함과 같았다. 칠원(漆原)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가 현재는 칠원(漆原)의 모현사(慕賢祠)에 복향(復享)되었다.

배 윤(裵 倫) : 자(字)는 무랑(務郞).

조선때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겸 어사(御史)를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배세현(裵世賢) : 자(字)는 성측(聖則).

조선에서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을 지냈다.

배세위(裵世緯) : 분성인(盆城人) 호(號) 명성(明城) 부사수후(府使秀厚) 자(子) 중종조(中宗朝) 성균진사(成均進士) 이학행(以學行) 증(贈) 참의(參議)에 천거되었다.

배 순(裵 純) : 자(字)는 세경(世經), 호(號)는 두암(杜庵).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를 지냈다.

배 학(裵 鶴) : 자(字)는 태충(太沖), 호(號)는 임천(林泉). 성품이 온후(溫厚)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기용(起用)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노천(老泉)에 별서계구당(別墅戒懼堂)을 세워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하면서 스스로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성달(裵成達) : 자(字)는 선문(善文), 조선(朝鮮)때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내며 선저(善政)을 베풀어 이민(吏民)이 칭송(稱頌)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배신침(裵愼忱) : 자(字)는 정숙(靜叔), 호(號)는 임당(林塘), 문장(文章)이 뛰어나고 행의(行誼)가 성실하여 세인(世人)의추앙(推仰)을 받았고, 노진(盧禛)․오건(吳健) 등과 더불어 도의(道義)와 성리학(性理學)을 강론(講論)하며 연마(硏磨)하였다. 1788년(정조12)에 사림(士林)의 추천(推薦)으로 산청(山淸)의 평천서원(平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윤침(裵允忱) : 자(字)는 윤숙(允淑), 호(號)는 지산(芝山). 조선(朝鮮)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역임하였다.

배철중(裵鐵重) :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고 기사(騎射)에 능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78년(선조11) 아산 현감(牙山縣監)․홍주 영장(洪州營將)에 기용(起用)되었다. 이듬해 모친(母親)의 병환(病患)이 위급할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수혈(輸血)하여 소생(蘇生)케 하였다. 인조(仁祖)때 사림(士林)들의 주청(奏請)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배 담(裵 湛) : 자(字)는 화여(和汝), 호(號)는 야은(野隱). 조선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덕 현령(盈德縣令)․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에 기용(起用)되어 3년간 재직(在職)하면서청백리(淸白吏)로 유명(有名)하였고, 사퇴한 후 군자동(君子洞)에 은거(隱居)하면서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군자동(君子洞)에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배 영(裵 渶) : 자(字)는 심원(深源), 호(號)는 인재(忍齋), 성품(性稟)이 순수(純粹)하여 당세(當世)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자손(子孫)을 교훈(敎訓)함에 반드시 충효(忠孝)로써가르치고, 시(詩)를 지어 자제(子弟)를 가르치며 만년(晩年)을 전원(田園)에서 마쳤다. 학행(學行)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상겸(裵尙謙) : 자(字)는 수익(受益), 호(號)는 호은(湖隱). 조선때 문장필법(文章筆法)이 뛰어난 학자(學者)로 당세(當世)에 유명하였다.

배원우(裵元佑) : 자(字)는 자동(自東). 호(號)는 두곡(杜谷).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陜)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保護)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다. 경북 하양군(慶北 河陽郡)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세겸(裵世謙) : 자(字)는 공익(公益), 호(號)는 심원재(心遠齋),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공(功)을 세우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任命)되었다. 평천사(平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명원(裵明遠) : 자(字)는 군회(君晦), 호(號)는 월정(月汀), 천성(天性)이 강직(剛直)하고 의리(義理)가 깊어 조식(曺植) 문하(門下)에서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사우(士友)의 추앙(推仰)을 받았고, 벼슬이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이르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진관 병마절제사(鎭管兵馬節制使)가 되어 성(城)을 지키다가 군중(軍中)에서 순사(殉死)하였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대유(裵大維) : 1563(명종 18)~ ?

자(字)는 자장(子張), 호(號)는 모정(慕亭), 부정(副正) 영(瑛)의 아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다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했다.

1608년(선조 4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12년(광해군 4) 지평(持平), 이어 정언(正言)․장령(掌令)․보덕(輔德)․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1621년(광해군 13)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올랐다. 대북(大北)에 가담하여 폐모론(廢母論)에 참여 했으므로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삭직(削職)당했다. 문장에 능했고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다.

배형원(裵亨遠) : 자(字)는 군길(君吉), 호(號)는 정곡(汀谷). 효행(孝行)이 지극하고 학문(學問)에 뜻이 있어 전원(田園)에 은거(隱居)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창의(倡義)하여 형(兄) 명원(明遠)과 함께 종군(從軍), 전공(戰功)을 세우고 원종공신(原從功臣) 이등(二等)에 책록되었다. 난(亂)이 끝난 후에 공명(功名)을 자랑하지 않고 임천(林泉)에 은거(隱居)하였다. 유일(遺逸)로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김해교수(金海敎授)를 지냈고,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서온(裵敍溫) : 1563~?(명조~?) 자(字)화중(和仲) 호(號)는 엄송당(掩松堂) 분성군(盆城君) 휘 원룡(元龍)의 12세손이며, 휘 도수(道秀)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17)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던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에게 사로잡힌 공은 곧 왜국으로 압송되었는데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심이 한결같이하였으며, 이에 감복한 적이 9년만에 공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는데 인조조(仁祖朝)에 공의위국충절이 조정에 알려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중직되었고 논과 밭을 하사받았다.

배경남(裵慶南) : 자(字)는 문길(門吉).

1572년(선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거쳐 단주 부사(端州府使)를 역임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나 류성룡(柳成龍)․이정귀(李廷龜) 등과 사귀었다.

배웅남(裵應男) : 초명(初名)은 응남(應男), 자(字)는 인수(仁叟), 호(號)는 운계(雲溪). 어려서부터 영특(英特)하고 성장함에 외모(外貌)가 준수하고 성격이 쾌활하여 대장부(大丈夫)의 풍도(風度)가 있으므로 그의 백부(伯父) 원우(元佑)가 그 기량(器量)을 중시하고 군신부자(君臣父子)의 윤리(倫理)와 오위진결(五衛陳結)의 방법(方法)을 공부하게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창의(倡義)하여 의사(義士) 박경전(朴慶傳)과 함께 운문협(雲門峽)에서 회맹(會盟)하고 적(敵)과 접전(接戰) 끝에 이를 소탕(掃蕩)하고 향민(鄕民)을 보호하였다. 선무(宣武) 이등(二等)에 녹훈되고 백부(伯父) 원우(元佑)와 함께 하양사(河陽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양옥(裵良玉) : 자(字)는 기지(器之), 호(號)는 사오당(四吾堂). 학문(學問)이 조숙(早熟)하여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추앙(推仰) 받았으나 과거(科擧)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 탐구(探究)에 뜻을 두어 장암(藏巖)에 은입(隱入)하여 잠적(潛跡)하고 정자(亭子)를 선바위 뒤층대(層臺)에 세우고 도의강마(道義講磨)에 전심(專心)하였다. 황협(黃峽)․맹헌(孟獻)․강헌지(姜獻之) 등과 시장(詩章)을 창화(唱和)하고 학문(學問)을 상교(相交)하였다.

배홍우(裵弘祐) : 자(字)는 수보(綏甫), 호(號)는 양지재(養志齋), 1616년(광해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고, 1618년(광해군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감찰(監察)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625년(인조 3)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비문(碑文)을 썼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지휘하에 의병(義兵)을 모집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배홍록(裵弘祿) : 1586~1643(선조19~인조21) 자는 응보(應甫)로 분성군(盆城君) 휘 원룡(元龍)의 13세손이며 모정공(慕亭公) 휘 대유(大維)의 차남이다. 공은 1612년(광해4) 무과에 급제하여 1615년 절충장군 행용양위부사정(折衝將軍 行龍讓衛副司正)을 재수받고 1618년에는 통정대부행웅천현감(通政大夫行熊川縣監) 1620년에는 이천도호부사겸병마첨절제사(伊川都護府使兼兵馬僉節制使) 이듬해에는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을 지냈다.

배 경(裵 絅) : 자(字)는 문보(文甫), 호(號)는 제헌(齊軒). 조선조(朝鮮朝)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배득신(裵得信) : 자(字)는 가정(佳亭), 호(號)는 정와(靜窩). 조선(朝鮮)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배동도(裵東度) : 자(字)는 여헌(汝憲), 호(號)는 일암(逸庵). 조선때 재질(才質)이 뛰어나서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였고, 죽림(竹林) 가운데 정사(精舍)를 세우고 후진(後進)을 위하여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했다. 그는 또한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버이 상(喪)을 당(當)했을 때 여막(廬幕)에서 3년 거상(居喪)을 마쳤다.

인조(仁祖)때 학행(學行)으로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辭讓)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역임하였다.

배명윤(裵命胤) : 자(字)는 덕승(德承), 호(號)는 삼외당(三畏堂),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새벽에 부모(父母)의 침소(寢所)에 문안(問安)하고 재사(齋舍)에서 글을 읽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해서는 여막(廬幕)에서 집상(執喪)하니 향리 사림(鄕里士林)의 주청(奏請)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여경(裵汝慶) : 자(字)는 선여(善餘), 호(號)는 일성재(一誠齋), 효우(孝友)가 출중(出衆)하여 형제(兄弟)가 한방에서 연상공금(聯床共衾)했다. 부모상(父母喪)을 거듭 당하니 계속해서 6년을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묘하(墓下)에 재실(齋室)을 세우니 사림(士林)들이 일성재(一誠齋)라 했다.

1695년(숙종21) 효행(孝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任命)되었으나 부임전에 죽었다.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追贈), 도암사(道巖祠)에 제향되었다.

배일장(裵一長) : 자(字)는 자첨(子襜), 호(號)는 계헌(戒軒). 조선때 산곡여막(山谷廬幕)에서 학구(學究) 끝에「심경보사(心經補辭)」를 저술(著述)하였다. 1675년(숙종1) 남구만(南九萬)의 천거(薦擧)로 강릉 참봉(康陵參奉)이 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전심했다. 합천(陜川)의 명곡서원(明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배진명(裵震明) : 자(字)는 덕휘(德輝), 호(號)는 모헌(慕軒), 박학(博學)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다. 부모상(父母喪)을 당(當)하여 여막(廬幕)에서 거상(居喪)했고 부모(父母)를 종신(終身) 사모(思慕)하는 뜻에서 호(號)를 모헌(慕軒)이라 하였다.

조정(朝廷)에서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 황협(黃峽)․맹헌(孟獻)과 호선락도(好善樂道)했다.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덕성(裵悳星) : 자(字)는 종일(宗一), 호(號)는 송은(松隱).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배세두(裵世斗) : 1682~1750[숙종~영조] 자는 국언(國彦)이다. 공은 형 세중(世重)과 함께 효우(孝友)가 돈독하여 조정에서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배왈대(裵曰大) : 자(字)는 군보(君甫), 호(號)는 운곡(雲谷). 조선(朝鮮)때 훈련원 부정(訓練院副正)에 이르렀다.

배필문(裵弼文) : 자(字)는 성뢰(聖賚), 호(號)는 각봉(覺峰). 조선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배식근(裵植根) : 조선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극소(裵克紹) : 1819~1871[순조~고종] 자는 내휴(乃休)이다. 공은 효행(孝行)과 문학으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1850년(철종1) 생원시(生員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영달(榮達)에는 뜻이 없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이 열중하여 ‘사례간요(四禮簡要)’ 일부(一部)와 ‘묵암목판(黙庵木板)’, ‘개몽자학(開蒙字學)’이 있다.

영남루 월야봉 이상사설 전 신원체 장원시(嶺南樓 月夜 逢 李上舍說 前 身怨債 壯元詩)는 一世에 훤전(喧傳)하고 있다.

배 찬(裵 瓚) :자는 우서(禹瑞), 호는 금계(錦溪). 조선때 사마(司馬)를 지냈다.

배치문(裵致文) : 1890-1942(고종27) 호는 고파(高坡) 분성군 휘 원룡(元龍)의 23세손으로 휘 익화(翊化)의 장남이다. 1890년 2월 17일 경남 김해시 한림면에서 출생하여 1909년 생계가 어려워 전가족이 전남 목포시로 이주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여 울분을 토로하며, 독립투쟁의 뜻을 키웠다. 1919년 4월 8일 목포지구의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받고 1년6개월의옥고를 치렀다. 1920년 12월 출옥후 중국상해로 망명하여, 1923년 3월 5일에 대한민국입시정부 국민대표자회의에 보천교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의혈단에 가입활동하였다. 1924년 1월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류되어 또 옥고를 치렀고 출옥후 호남평론사의 객원기자로 독립투쟁과 신간회 목포지회장으로도 활동하다가 1941년 체포되어 출판법, 보안법,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1942년 5월 20일 목포형무소에서 53세에 옥사하였다. 경남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기적비(紀蹟碑)가 세워졌다.

배동석(裵東奭) : 1891(고종28)~ 1921

성두(聖斗)의 아들. 경남 김해(金海) 출신. 1906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중, 배일사상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 복역하고 출옥 후 동교(同校)를 중퇴, 서울 경신학교(경신學校)를 졸업했다.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다시 배일운동 협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와 국외로 탈출하여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 등과 활동했다. 1918년 귀국, 경성연합의전(京城聯合醫專;세브란스)에 입학, 1919년2월 김원벽(金元壁)․이갑성(李甲成)․한위건(韓偉健) 등과 음악회를 가장하고 3․1운동의 전개를 의논, 3월 1일 학생 대표로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하다가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했다.

배덕수(裵德秀) : 한말(韓末)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 활약하였다.

배중세(裵重世) : 경남 창원 출신으로 1919. 5월 의열단(義烈團)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경에 붙들려 2번의 옥고를 치르고 계속 뜻을 굽히지 않고 투쟁하던 중 1944. 대구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