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9-10 13:51
1882(고종 19)~? 호(號)는 고당(古堂), 경학의 아들. 평남 강서(江西) 출신. 15세까지서당(書堂)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1905년(광무 9)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 재학 중 기독교(基督敎)에 입교(入敎), 1908년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세이소꾸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했다.
그동안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 주의에 크게감동 받아 자기사상과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0년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학부(法學部)에 입학, 1913년 졸업 후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취임했고, 1919년 동교교장이 되었다.
이해 교장을 사직하고 3․1 운동에 참가,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잡혀 평양 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921년 평양 기독교 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의 장로(長老)로 사무, 이듬해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했다.
1923년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 다음해 이들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뒤에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이 되었다가, 1926년 일제(日帝)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직했다.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에 참여했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좌절된 후 1930년에는 관서체육회장을 지내고, 1932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사장이 되어 민족언록창달에 공헌했다.
그 뒤 많은 후진들과 기독교인들의 무저항 민족주의(無抵抗民族主義) 운동을 지도했다. 1943년에 지원병(志願兵) 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하러온 조선군 사령관 이다가끼(權垣征四郞)와의 면담을 거절, 이를 극력 반대하다 구금당했다.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 교회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폐쇄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평안남도(平安南道)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와 평남 인민정치위원회(人民政治委員會)의 위원장(委員長)이되어 질서 유지와 국민의 지도에 앞장섰다.
한편 소련 군정청(軍政廳)에서 북조선 인민정치위원회(北朝鮮人民政治委員會)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고했으나 소련의 한국 공산화(韓國共産化) 정책을 간파하여 취임을 거부하고, 이해 11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反共路線)을 뚜렷이 하고 반탁운동(反託運動)의 선봉에 나섰다.
이에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은 소련 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접수(接受)되고 그는 소련군에 의해 고려(高麗) 호텔에 연 금, 그들의 협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월남(越南)을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에도 동포를 남겨 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없다고 거부했다. 6․25사변 때 공산당에게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