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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원제씨] 제말(諸 沫)

작성일 : 2019-09-05 09:53

1544년 중종39)~1592(선조 25).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고성(固城) 출신. 제조겸의 5자(子) 체구가 크고 팔이 길어 영웅호걸의 기상으로 힘이 세고 수염이 무성해 성을 내면 뻣뻣이 하늘로 치솟고 그 가 싸울 때는 마치 우레(雨雷)가 기둥을 깨뜨리고 바람이 강물을 요동하듯 천지가 진동하였음으로 적병이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그를 나는(飛) 장군(將軍)이라 했다. 조카 홍록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을 거쳐 가장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해 적의 예봉(銳鋒)을 무찌르고 군사를 거느려 고성(固城)에서 분연히 몸을 일으켜 진양으로 달려가 진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웅천, 정암나루, 조령(鳥嶺), 무계(茂溪) 전투에서 대승한 후 성주(星州)를 평정하여 그 공으로 성주 목사가 되어 적병을 많이 섬멸한 후 아군 전투병이 부족하여 성이 함락되자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리는 태산 같이 무겁게 생각하고 목숨은 홍모(鴻毛)처럼 가벼이 여겼다. 1792년(정조 15)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의 시호(諡號)가 내렸다. 성주와 진주에 제씨쌍충사적비가 정조의 어명으로 건립되어 현존하고 있을 뿐아니라 1812년(순조 12)에 충의(忠毅)라는 시호(諡號)를 다시 받았으며 운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은 갑자기 일어나 적을 토벌하여 향하는 곳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으니 그의 명성(名聲)은 곽재우 정기룡보다 낫다고 말했고, 판윤(判尹) 유최기(兪最基)는 싸울 때마다 용맹한 기상이 하늘을 찌르고 수염이 가시와 같았기에 왜적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두려워했다라고 했으며 관찰사(觀察使) 정익하(鄭益夏)는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며 만고(萬古)충렬(忠烈)이라 했으니 이는 분명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조(吏曹) 판서(判書) 서유린(徐宥獜)은 신도(神道)비문(碑文)을 지어 당나라 현종조에 안록산의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이후에 오직 공이 있을 뿐이라 격찬했고, 당항포 현충탑(顯忠塔)과 대구(大邱) 영남충의단(嶺南忠義壇)에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되고 충남(忠南) 보령(保寧)에 임란공신숭모회(壬亂功臣崇慕會) 공적비(功績碑)가 건립(建立)되었고 각 「도읍지(都邑誌) 및 향교지(鄕校誌)」, 「경상남도(慶尙南道) 유림(儒林)보감(寶鑑)」에 전공(戰功)사적(史蹟)이 등재(登梓)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