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9-03 11:03
1648(인조 26)~1736(영조 12) 자(字)는 중순(仲淳), 호(號)는 장암(丈巖),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좌의정(左議政) 철(澈)의 현손, 감찰(監察) 경연(慶演)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82년(숙종 8) 생원(生員)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언(正言)을 지 내고, 1689년 기사환국(己巳煥局)으로 파직,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했 다가 이어서 경성(鏡瑆)에 유배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이 기용될 때 풀려 나와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敎理) 등을 역임. 1698년 집의(執義)․사간(司諫)을 거쳐, 이듬해 동래 부사(洞萊府使)로 나갔다가 1700년 신은(新銀) 12만 냥의 취급 부주의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기용되어 광주부윤(廣州府尹)에 등용, 1702년 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 1704년 함경도 관찰사 등을 거쳐 도승지(都承旨).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1713년 대사성(大司成)에 재임되어 송시열의 묘정(廟庭) 배향(配享)을 건의했고, 1715년 부제학으로서 유 계(兪 棨)의 유저(遺著)「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에 소론(少論) 윤 증(尹 拯)이 스승 송시열을 등지고 당쟁을 조장했다는 내용을 썼다가 파직되었다.
이 사건으로 노론․소론의 당쟁이 격화되었으나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서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이해 윤선거(尹宣擧)의 문집「노소유고(魯西遺稿)」가 간행되자 효종(孝宗)을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毁板),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追奪)케 했다.
1717년(숙종 43) 세자(世子 : 경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의 건의,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케 했고, 다음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1721년(경종 1)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서「숙종실록(肅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莘壬士禍)로 파직되어 강진(康津)에 유배당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 나와 우의정에 특진, 신임 사화로 사사(賜死)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누차 상호했으며,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치사(致仕)했다. 송시열 문하의 뛰어난 학자로 일생을 노론으 선봉으로 활약했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모두 솜씨가 있었다. 충주(忠州)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