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8-30 11:21
?~1454(단조 2) 자(字)는 자외, 호(號)는 애일당(愛日堂),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오(以吾)의 아들.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1421년(세종3)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425년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고, 사인(舍人)으로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이 되어 수재민(水災民)을 구호했다.
1430년 집의(執義)로서 성 개(成 槩)의 노비 사건을 계문(啓聞)하지 않은 죄로 유배되었다. 1432년 풀려 나와 우부대언(右副代言)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역임, 이듬해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44년(세종 26) 예조 참판(禮曹參 判)․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후 1447년 좌참찬(左參贊)으로 숭례문(崇禮門) 건축공사를 감독했다.
1449년 판이 조사(判吏曹事)를 거쳐, 이듬해 우찬성(右贊成)으로 충청․전라․경상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직하고, 1451년(문종1) 좌찬성(左贊成)․판호조사(判戶曹事)를 겸임, 이듬해 문종이 죽을때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과 어린 세자(世子 : 단종)의 보호를 부탁 받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전라․충청․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충주(忠州)로 향하던 중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낙안(樂安)에 안치(安置)되어 관노(官奴)가 되었다가 사사(賜死) 당했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장흥(長興)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