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8-29 12:08
1433(세종 15)~1489(성종 20) 자(字)는 국형(國馨), 호(號)는 허백당(虛白堂), 시호(諡號)는 익혜(翼惠), 진주 목사(晋州牧使) 사(賜)의 아들, 1456년(세조 2)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하고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검열(檢閱)․대교(待敎)․통례문 봉례랑(通禮文奉禮郞)․감찰(監察)․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내고, 1460년(세조 6) 봉교(奉敎)로 정자청(鄭自淸)과 함께 서얼(庶蘖) 출신의 과거응시를 반대했다.
1463년 시강원 문학(侍講院 文學)을 거쳐 예조 정랑(禮曹 正郞)․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을 지내고, 146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했다. 그 후 좌부승지(左副承旨)․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낸 뒤 등준시(登俊試)에 급제,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오위장(五衛將)을 겸했다.
1467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군정(軍丁)을 모아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전임, 1469년(예종 1)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서「세조실록(世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1470년(성종 1)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동래군(東萊君)에 봉해졌고,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호조 참판․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3년(성종 14) 주문부사(奏聞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이조 판서․공조 판서․호조 판 서 등을 지냈다. 훈구파(勳舊派)의 중진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초서(草書)․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고 촉체(蜀體)에도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