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9-08-29 12:03
1378(우왕 4)~1439(세종 21) 자(字)는 요좌(堯佐),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감찰대부(監察大夫) 양생(良生)의 손자, 부(符)의 아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음보(蔭補)로 지평(持平)이 되고, 1408년(태종 8) 박은(朴 訔)을 민무질(閔無疾)의 일파라 하여 탄핵하다 장흥(長興)에 유배되었다.
그 후 풀려 나와 141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이조와 병조의 정랑(正郞), 좌헌납(左獻納)을 거쳐 1416년 장령(掌令)이 되었을 때, 좌의정(左議政) 박은과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 擢) 사이에 노비(奴婢) 문제로 송사(訟事)가 생기자 다시 박은을 탄핵, 그의 미움을 받아 파직 당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봉상사 소윤(奉常寺少尹)으로 등용, 이어 집의(執義)․지형조사(知刑曹事)․동부대언(同副代言)․지신사(知申事)․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 1430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이듬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며, 1433년 황보인(皇甫仁) 등과 「계축진설(癸丑陣說)」을 찬진(撰進), 이어 충청(忠淸)․전라(全羅) ․경상(慶尙) 삼도 도순무사(三道都巡撫使)가 되어 주군(州郡)의 성(城) 터를 심정(審定)했다.
1435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부임, 새로 설치된 4진(鎭)의 수비와 민심 안정에 공헌하고, 1437년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다. 널리 경사(經史)에 통했으며 천문(天文)에도 밝아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