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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윤씨] 윤치호(尹致昊)

작성일 : 2018-08-02 15:27

1865(고종 2)~1945 호(號)는 좌옹(佐翁). 충청도 출신.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고종 18) 17세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수원(隨員)으로 일본에 다녀온 후 미국에 건너가서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미국공사 푸우트의 통역관으로 귀국, 이듬해 주사(主事)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總理大臣秘書官)을 거쳐 학부 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으로 투옥,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때 다시 복직, 민영환(閔泳煥)을 따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했다. 귀국 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 1898년(광무 2) 제2대 회장이 되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 사장을 겸임했다.

이해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 시정개혁(施政改革) 6개조를 결의 상소하여 자주독립과 경제번영을 위한 민중의 의사를 반영시켰으며 그후 황국협회(皇國協會)의 모함과 테러로 피신, 독립협회도 해산당했다. 이듬해 정부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하려 했으나 거절하고 함경도 덕원 부윤(德源府尹)으로 나갔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과 국력 배양에 힘썼으며, 1910년(융희 4) 대한 기독교 청년회를 창설, 회장이 되고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피체, 이듬해 10년 형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