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8-02 14:27
1533(중종 28)~1601(선조 34) 자(字)는 자앙(子仰), 호(號)는 오음(梧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군자감정(軍資監正) 변(忭)의 아들. 이 황(李 滉)․이중호(李仲虎)의 문인. 1555년(명종 10) 생원(生員)이 되고,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에 급제, 정자(正字)․저작(著作)을 거쳐 1563년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권신(權臣) 이 양(李 樑)의 아들을 천거할 것을 거부하여 파직, 이해 이 양이 제거되자 수찬(修撰)으로 등용 되었다.
그후 이조․공조․형조․호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역임. 1577년(선조 10)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도승지(都承旨)로서 이종제(女夷從弟) 이 수(李 銖)의 옥사(獄事)에 연좌, 파직되었다.
1579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기용,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승진, 이어 부총관(副摠官)․형조 참판(形曹參判) 등을 거쳐 1587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다.
1590년 종계변무(宗系辯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고, 형조 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듬해 호조 판서에 전임했다. 이해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서인(西人) 정 철(鄭 澈)이 화를 입자 같은 서인으로 연루, 회령(會寧)에 유배되고, 이어 홍원(洪原)․연안(延安) 등지로 이배(移配) 당했다가 전리(田里)에 방송(放送)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왕을 호종(扈從), 개성(開城)에 이르러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고 이어 우의정(右議政)에 승진, 평양(平壤)에 가서 좌의정(左議政)에 올랐다.
이때 평양이 위급해지자 함흥(咸興)으로 몽진(蒙塵)하자는 조의(朝議)를 반대, 의주(義州)로 갈 것을 주장, 이를 실현케 함으로써 뒤에 함흥이 함락된 뒤에도 왕이 무사하여 그 선견지명을 칭찬받았으며, 왕이 요동(遼東)에 까지 피난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하루에도 다섯 번 씩이나 상소를 하였다.
1594년 세자(世子)를 시종, 남하(南下)하여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고, 이듬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왕비를 해주(海州)로 시종했고, 1598년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 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글씨에도 문징명체(文徵明體)를 본떠 일가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