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諱)는 공이고 자(字)는 공보(公寶)이다.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아들이다. 모비(母妃)는 효의 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이다. 관향은 청풍(淸風)으로 청원부원군 김시목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수빈박씨(綬嬪朴氏)이다. 관향은 반남(潘南)이다.
11월 초6일 병이 있어 편안하지 못하다가 13일에 경희궁(慶熙宮)의 회상정(會祥殿)에서 승하하니, 춘추(春秋)가 45세였다. 묘호(廟號)를 ‘순종(純宗)’이라고 하였다. 을미년(乙未年) 4월 19일 무신(戊申)에 교하(交河)의 인릉(仁陵)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모비(母妃)는 예경 자수 효의 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 김씨(金氏)이니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정익공(靖翼公) 김시묵(金時?)의 따님이다.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실제로 왕을 낳았는데, 효의 왕후가 정종(正宗)의 명에 의하여 데려와서 아들로 삼고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였다. 수빈은 증 영의정(贈領議政) 충헌공(忠獻公) 박준원(朴準源)의 따님이다. 이보다 앞서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졸서(卒逝)하자 정종이 저사(儲嗣)에 대해 매우 근심을 하고 있던 중에 기유년 봄에 이르러 궁인(宮人)이 용이 나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조금 뒤에 수빈이 임신하였는데 바라보는 눈길이 맑고도 밝았고 이상한 신채(神彩)가 발산되었으므로 궁중의 상하가 모두 큰 경사가 있을 조짐으로 여겼다. 경술년 6월 18일 왕이 탄생하였다.
경신년 봄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고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6월에 정종(正宗)께서 승하하시자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卽位)하였고 정순 왕후(貞純王后)가 수렴(垂簾)하고서 같이 청정(聽政)하였으므로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왕은 한결같이 모두 여쭈어 결정하였고 감히 혹시라도 마음대로 한 적이 없었다. 임술년 겨울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과 아울러 폐종(廢宗)된 인, 인의 아내, 그 아들 담(湛)의 아내까지 죄에 얽어 넣어 죽게 하였으나 왕의 뜻이 아니었다. 뒤에 왕이 마침내 다시 홍낙임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고 인의 자녀들을 섬에서 나오게 하여 집을 지어주고 시집 장가보내었다.
기사년에 왕세자가 탄생하여 전궁(殿宮)에 진하(陳賀)하고 나서 상신(相臣)의 건백(建白)으로 인하여 수빈(綬嬪)에게 진호(進號)하였는데, 이는 저하(邸下)를 위하여 존봉(尊奉)한 것으로 혜경궁의 의절(儀節)과 대등하게 하였다. 을해년에 혜경궁이 훙서(薨逝)하니 대공(大功)의 복제(服制)로 상복을 입었다. 신사년에 효의 왕후가 승하하자 왕은 슬퍼하고 사모하는 것을 경신년 때와 같게 하였으며 건릉(健陵)으로 이봉(移奉)하여 합부(合?)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 수빈이 졸서(卒逝)하니, 왕이 시마 삼월복(?麻三月服)을 입었다. 제복(除服)하고 나서는 흰 의관[索衣冠]을 입고 3년 동안 지냈다.
정해년에 왕세자에게 군국 대사(軍國大事)를 대리(代理)하여 스스로 결단하도록 명하였다. 경인년에 세자가 훙서(薨逝)하니 원손(元孫)을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하였다. 임진년에 두 공주(公主)가 또 서로 잇따라 요서(夭逝)하니, 왕은 아프고 슬픈 마음을 안색에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영위(榮衛)가 안에서 삭아져서 항상 실의(失意)한 모습으로 즐거움이 없는 것 같았다.
왕비(王妃) 김씨(金氏)는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인데,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의 따님이다.
2남 3녀를 낳았다. 1남은 효명 세자(孝明世子)이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익종 대왕(翼宗大王)으로 추존(追尊)하였다. 2남은 요서(夭逝)하였다. 1녀는 명온 공주(明溫公主)인데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하였다. 2녀는 복온 공주(福溫公主)인데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하였으나, 모두 일찍 졸서(卒逝)하여 소생이 없다. 3녀는 덕온 공주(德溫公主)인데 남영위 윤의선(南寧尉 尹宜善)에게 하가하였다. 숙의(淑儀) 박씨(朴氏)가 영온 옹주(永溫翁主)를 낳았는데 또한 요서(夭逝)하였다. 익종의 비(妃) 조씨(趙氏)는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따님인데 헌종(憲宗)을 탄생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