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8-01 13:58
1587(선조 20)~1671(현종 12)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해옹(海翁), 시호(諡號)는 충헌(忠憲), 참찬(叅贊) 의중(毅中)의 손자,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 관찰사 유기(惟幾)에게 입양(入養). 1612년(광해군 4) 진사(進士)가 되고, 1616년 성균관(成均館)의 유생으로서 권신 이이첨(李 爾瞻) 일당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이듬해 경원(慶源)에 유배, 이어 기장(機張)에 이배되는 등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석방,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해남(海南)에 내려갔으며, 찰방(察訪)․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에 임명 되었으나 모두 사퇴, 16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어 특히 봉림 대군(鳳林大君 : 효종)을 보도(輔導)했다.
이듬해 공조 좌랑(工曹佐郞)․형조 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호조 정랑․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역임,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예조 정랑(禮曹正郞)․문학(文學)을 지냈고, 이해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 현감(星山縣監)에 좌천되었다가 1635년 파직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왕을 호종하지 않아 화의가 성립된 뒤 영덕(盈德)에 유배, 이듬해 방환된 후부터 은거했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불리어 사예(司藝)를 거쳐 예조 참의(禮曹叅議)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 다시 은퇴했다가 1657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기용되고, 이듬해 공조 참의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같은 남인(南人)인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을 철폐하려는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노쟁하다가 3사(司)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었다.
남인의 거두로서 1659년 효종(孝宗)이 죽자 산릉 간심관(山陵看審官)이 되어 수원(水原)에 장지를 정했다가 서인(西人)의 반대로 묵살되고,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3년설을 주장, 서인들의 정치세력을 꺾으려다가 서인들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됨으로써 삼수(三水)에 유배되고 남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어 위리안치(圍籬安置), 1667년(현종 8) 방환되었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으며, 그 동안의 작품은「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경원 배소에서 지은「견회요(遣懷謠)」와「우후요(雨後謠)」, 영덕 배소에서 풀려나와 고향에서 지은「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노후에 은퇴하여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등의 시가(詩歌)는 미답지를 개척하고 우리말 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활용한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1675년(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