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通禮公 克堅의 十七代孫) 자(字)는 덕윤(德潤), 호(號)는 일몽(一夢)이요 문익공(文翼公) 원정(元禎)의 十代孫으로 고종(高宗) 신묘(辛卯 1891)년 2월 17일 경북(慶北) 왜관읍(倭관邑) 석전동(石田洞)에서 출생하였다. 나면서부터 과묵(寡默)준수(俊秀)하고 기개(氣槪)가 있어 7살에 한문(漢文)을 배울 적에도 충신의사(忠臣義士)들이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는 구절(句節)에 이르러서는 매양 감탄(感歎)하였다. 20세에 향리의 동락학원(同樂學院)을 거쳐 서울보혜학교(普惠學校)에서 신학문(新學問)을 배우던 중 문득 국권(國權)회복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분연히 몸을 독립운동에 던졌다. 23세에 안자산(安自山) 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밀양(密陽)에서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고 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己未年 三一運動 이후 이각(李覺)이라 변명(變名)하고 만주로 건너가 김상윤(金相潤)ㆍ김원봉(金元鳳)ㆍ곽재기(郭在驥) 등의 의열단(義烈團)에 가담, 실천방법을 세우고 2년 뒤에 왜정기관(倭政機關)의 폭파(爆破)사명(使命)을 띠고 입국하여 서울, 안동, 밀양, 부산, 창원, 마산 등지를 왕래하던 중 부산에서 체포되자 벙어리 노릇으로 꾀를 써서 풀려났다. 그 후 10년 동안 중국의 독립단(獨立團)에 국내(國內)정세(情勢)를 밀통(密通)하며 자금조달에 힘쓰는 한편 동지 이종암(李鍾岩)ㆍ김상윤(金相潤)ㆍ서상락(徐相洛) 등과 모의(謀議) 재거(再擧)를 꾀하던 중 고향 본가에 잠시 들렸다가 일경에 탐지(探知)되어 1924년 1월 25일 새벽에 붙잡혀 7년형의 선고를 받고 대구감옥에서 동지 이종암(李鍾岩) 등과 함께 복역하던 중 3년 만에 출옥(出獄)하였으나 악독한 고문의 여독(갈비뼈가 부러졌음)으로 정묘(丁卯 1927)년 6월 6일 37세로 세상을 뜨셨다. 혹독한 고문에도 연루 동지를 한 사람도 불어대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사회장(社會葬)으로 모시고저 하였으나 왜경(倭警) 저지(沮止)로 실행되지 못하고 쓸쓸히 가족장(家族葬)으로 모셨다. 천도(天道)가 무심치 아니하여 가신지 18년만에 조국은 광복되고 또 광복된 지 20년만인 1966년 6월 6일에 일몽선생추모기념사업회(一夢先生追慕紀念事業會)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지었는데 그 글 끝에 이르기를 「늦게나마 선생(先生)의 뜻과 행적(行跡)을 돌에 새겨 고향 땅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 기념비(記念碑)를 세우게 되었으니 어찌 느꼅지 아니하랴! 겨레의 자유를 위해 조국의 제단에 생명을 바친 투사(鬪士)의 혼(魂)이 깃드신 곳 만고(萬古)에 끊임없이 흐르는 저 낙동강(洛東江)물도 목메여 울어 예는 여기, 동포(同胞)여 이 앞에 이르거던 부디 님의 뜻 가슴에 새겨 내 나라 빛낼 것 잊지 마소서」하였다. (出典 獨立運動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