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8-01 11:05
(左通禮公 克堅 十四代孫) 자(字)는 응오(應五), 호(號)는 지강(之剛). 신유(辛酉 1861)年 十月 四日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칠곡면(漆谷面) 자지리(紫芝里)에서 출생하니 천성(天性)이 영우(英遇)하고 재기(才氣)가 출중하여 15세에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通達)하였다. 그 후 더욱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세전(世傳)의 유학(儒學)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고루 읽었고 천문, 지리, 의학, 복서(卜筮)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精通)하여 당시 사림(士林)에서 추중(推重)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도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하여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논의하고 걱정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관찰사 이용직(李容直)은 공(公)을 조정(朝廷)에 천거(薦擧)하였으나 그는 고사(固辭)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910년 민족의 치욕인 합방조약(合邦條約)이 있은 후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매국노(賣國奴)를 성토(聲討)하였다. 1913년 그는 구국책(救國策)을 모색한 나머지 동지(同志) 황종언(黃鍾彦-新義州)ㆍ박경종(朴慶鍾-盈德)ㆍ이승화(李承和-衡國(安東))ㆍ이헌교(李憲敎-英陽)ㆍ이종태(李鍾泰-忠南燕岐) 등과 연락하여 만주(滿洲)에서의 독립군(獨立軍) 양성(養成) 자금(資金) 이십만원의 모금운동을 펴기로 합모(合謀)하고 경기, 충남, 경상도 등지의 동지들에게 전달하고 모금활동을 하던 중 왜경(倭警)에 탐지(探知) 여러 동지들과 체포되어 갖은 고문당한 끝에 일년형을 받고 서대문(西大門) 형무소(刑務所)에서 옥고(獄苦)를 치루었다. 1933년 3월 26일 그는 조국광복을 염원하면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이 73세이었다. 방은(放隱) 성락훈(成樂薰)이 지은 그의 묘비명에 이르기를「효행(孝行)에 있어서는 소남(邵南)과 같고 역학(易學)에 있어서는 강절(康節)과 같도다. 나라를 위해 한 번 탈기(奪起)하자 그 의기(義氣)가 드높더라. 나라는 이제 광복(光復)이 되었으니 선생(先生)도 지하(地下)에서 기뻐하시리. 이 곳을 지나가는 모든 길손이여, 선생의 묘전(墓前)에서 옷깃을 여밀지어다」하였다.
(소남지행(邵南之行)ㆍ강절지학(康節之學)ㆍ위국일탈(爲國一奪)ㆍ의기지탁(義氣之卓)ㆍ국경복의(國竟復矣)ㆍ공소구원(公笑九原)ㆍ범백과자(凡百過者)ㆍ식차묘문(式此墓門) (출전 충북판 독립운동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