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8-01 10:45
1561(명종 16) ~ 1613(광해군 5)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한음(漢蔭)ㆍ쌍송(雙松)ㆍ포옹산인(抱擁散人),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민성(民聖)의 아들. 좌의정(左議政) 극균(克均)의 오대손(五代孫).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고, 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 때 율곡이 다섯 명을 천거하였는데 이 중 같은 해에 급제한 이항복(李恒福) 이정립(李廷立)과 함께 세 분을 삼학사라 하였다. 이듬해 박사가 되고,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이조좌랑(吏曹佐郞)ㆍ대사간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 1592년 31세로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했고,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ㆍ야니가와(柳川調信) 등과 화전(和戰)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했다.
그후 왕을 호종(扈從), 정주(定洲)에 이르러 청원사(請援使)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원병을 요청, 지원군 파견에 성공했다. 귀국 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오르게 되고, 명나라 원병이 들어오자 명장(名將)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으로 전쟁 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1593년 병조판서에 승진, 이듬해 이조판서로 전직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 당상(堂上)을 겸임. 1595년 경기ㆍ황해ㆍ평안ㆍ함경 등 4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지냈으며, 1598년 38세로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 도제조(都提調)를 겸했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ㆍ전라ㆍ충청ㆍ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쟁 후의 민심 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는 한편, 대마도(對馬島)의 정벌을 건의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 1606년 한 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의 한직(閒職)에 밀려났다가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에 복직,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가 삭직(削職), 양근(陽根)에 내려가 죽었다.
남인(南人) 출신으로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어, 남ㆍ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복귀했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야담(野談)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글씨에 뛰어났다. 인조 때 복관(復官)되었고, 포천(抱川)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尙州)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