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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이준경(李浚慶)

작성일 : 2018-08-01 10:35

1499(연산군 5) ~ 1572(선조 5) ()는 원길(原吉), ()는 동고(東皐)ㆍ남당(南堂)ㆍ양와(養窩)ㆍ홍련거사(紅蓮居士), 시호(諡號)는 충정(忠正), 부수찬(副修撰) 수정(守貞)의 아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를 입은 조부와 부친에 연좌하여 형 윤경(潤慶)과 같이 괴산(傀山)에 유배(流配)되었으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 나온 뒤 신승연(申承演)ㆍ황효헌(黃孝獻)에게 수학, 1522(중종 17) 생원(生員)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다가 1533년 사경(司經)으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피죄인(被罪人)의 무죄를 논()했다가 김안로(金安老) 등의 미움을 사서 파직,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뒤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응교(應敎)ㆍ보덕(報德)ㆍ승지(承旨)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ㆍ부제학(副提學), 1543년 문신정시(文臣廷試)에 장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오르고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이듬해 중종이 죽고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이 되었고, 1545(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했다. 1548년 병조판서ㆍ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550년 대사헌이 되었다.

앞서 병조 판서 때 이기(李기)가 뇌물을 받고 구관자(求官者)의 이름을 적어 보내어 등용을 청했으나, 이를 거절했던 일로 그 일당인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으로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이기(李기)가 파직되자 석방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1553년 함경도 지방에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자 함경도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했다. 1555년 호남지방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자 전라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출정, 이를 격퇴하고 돌아와 우찬성(右贊成) 겸 병조판서가 되고,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명종 20)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명종이 죽자 교지를 받들어 선조를 영립(迎立)하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사를 다스리며, 신진사류(新進士類)와 기성사림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려다가 신진사류의 정적(政敵)이 되어 기대승(奇大升) 등의 공격을 받았다.

1571(선조 4) 영의정을 사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죽을 때 붕당(朋黨)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유소(遺疏)를 올려 이이(李珥)3()의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나 그의 예언이 적중했다. 선조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청안(靑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