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2-1432. 자는 주도(周道)이고 호는 기우자(騎牛子) 또는 백암거사(白巖居士)· 일가도인(一可道人)이라 했으며 목사(牧使) 천백(天白)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 말 혼란기에 국방· 외교· 산업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붙들기 위하여 이성계(李成桂)의 역성(易姓) 혁명세력과 마지막까지 대결함으로써 충절을 빛내었다. 특히 100년에 가까운 원(元)나라의 직할통치로 본토에서 이탈해 있던 탐라(耽羅: 지금의 濟州道)로 건너가 성주(星主) 고신걸(高信傑)을 설득하여 제주도를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귀순(歸順)시킨 일이라든지, 공양왕(恭讓王) 때 문란한 인사행정의 시정을 위해 올린「간첨설직소(諫添設職疏)」및 토지개혁을 주장한「전제소(田制疎)」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으로 있을 때 충신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조영규(趙英珪)를 ‘만고의 흉인’으로 몰았고 자신이 기초한『고려사(高麗史)』의 개찬(改撰)을 거부하여 사관(史官)으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일도 특기할 만하다. 야인(野人)으로 물러나 있을 때는『양잠방(養蠶方)』이란 책을 만들어 누에고치의 생산 등 산업진흥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고, 조선조에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번갈아가며 벼슬을 내렸으나 행공(行公)을 하지 않는 채, 평해(平海)와 강음(江陰)에서 소를 타고 시주(詩酒)로서 여생을 자정(自靖)하였다. 사후에 세종(世宗)은 제문(祭文)과 함께 문절(文節)이란 시호와 여산부원군(驪山府院君)의 봉호를 내려 추모하였다. 저서에『기우자집(騎牛子集)』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