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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윤증(尹 拯)

작성일 : 2018-07-26 13:38

1629(인조 7)~1714(숙종 40) 자(字)는 자인(子仁), 호(號)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諡號)는 문성(文成), 선거(宣擧)의 아들. 유계(兪棨)․권 시(權諰)․김 집(金 集)의 문인, 후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었으나 절교했다.

1663(현종 4) 학행(學行)으로 천거된 이래 현종(顯宗) 때 지평(持平)․진선(進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682(숙종 8) 호조 참의(戶曹參議), 1684년 대사헌(大司憲), 1695년 우참찬(右參贊), 1701년 좌찬성(左贊成), 1709(숙종 35) 우의정(右議政), 1711년 판돈령부사 (判敦寧府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었다. 1673(현종 14) 송시열에게 아버지 선거의 묘갈명(墓碣名)을 지어줄것을 요구했으나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行狀)을 그대로 인용한 뒤에 야유하는 뜻의 글을 받고 불만을 품던 중 1681(숙종 7) 송시 열의 학문과 덕행의 결함을 지적하여 썼던 서신이 송시열에게 전해 짐으로써 마침내 절교당했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南人)에 대한 처벌에 있어서 집권층인 서인(西人)이 강․온(强․穩) 양파로 분리되자 온건을 주장하는 소론의 영수(領袖)에 추대되어 강경파인 송시열측 노론(老論)과 치열한 당쟁을 벌였다.

이때부터 이산(尼山)에 머물러 학문연구와 후진의 교육에 힘썼으며, 1715(숙종 41) 간행된 스승 유 계의 저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에서 정호(鄭澔)가 윤증을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의 격화소론이 거세되면서 이듬해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722(경종 2) 유생(儒生) 김수귀(金壽龜)․ 황욱(黃 昱) 등의 상소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홍주(洪州)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