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7-26 13:35
1610(광해군 2)~1669(현종 10) 자(字)는 길보(吉甫), 호(號)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대사간 황(煌)의 아들, 증(拯)의 아버지. 김 집(金 集)의 문인. 1633년(인조 11)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고, 1636년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했을 때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자고 상소했으며, 이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江華)에 피난, 성문을 지키다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성을 탈출, 자의(諮議)․형조좌랑(刑曹佐郞)․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등의 벼슬에 여러번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금산(錦山)에 가서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정진했다.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했고 성리가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평소 친교가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 휴(尹 鑴)가 학문으로 대립하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오히려 양인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1715년 유 계(兪棨)와의 공편(共編)인「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으로 노소론의 싸움이 일어나자 이듬해 아들과 께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722년(함경종 2) 부자가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모두 능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교하(交河)의 신곡서원(新谷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