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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이씨] 이승훈(李承薰)

작성일 : 2018-07-24 11:27

1756(영조 32)1801(순조 1) 교명은 베드로, 참판(參判) 동욱(東郁)의 아들, 가환(家煥)의 생질, 정약용(丁若鏞)의 매부. 1780(정조 4) 진사지(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 벽(李 蘗)을 만나 입교(入敎)를 결심. 1783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북경 남천주당(南天主堂)에서 교리를 익힌 후 이듬해 북경(北京) 북천주당에서 예수회의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領洗)을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이해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갖고 귀국, 1785년 명례동(明禮洞)의 김범우(金範禹) 집에 조선교회를 건립, 주일(主日) 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했다. 이듬해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했다.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했으며, 1789년 평택 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북경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 천주교의 자치 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祭祀)도 철폐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밀령(密令)을 받고 오자 제사문제로 두번째 배교, 그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1791(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한 후 투옥, 옥중에서 세번째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으나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윤유일 등이 피체,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예산(禮山)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의 취조를 받고 권 엄(權 欕) 등의 상소로 이해 2월 서소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56(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신원(伸寃)되었다.

1868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 1871년 증손 연귀(蓮龜)균귀(筠龜)가 각각 순교하여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