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8-07-24 11:08
1450(세종 32)~1506(연산군 12) 자(字)는 자준(子俊), 호(號)는 동호(東湖), 시호(號)는 헌무(憲武). 1470년(성종 1) 겸사복(兼司僕)으로 무과(武科)에 장원, 훈련원 판관 (訓鍊院判官)이 되고, 1476년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 존친부 전첨(宗親府典籤)․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지냈다.
1479년(성종 10) 선전관(宣傳官)․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오고., 이 해 윤필상(尹弼商)을 따라 건주위(建州衛)를 정벌, 형조 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1483년 영안북도 병마절도사(永安北道兵馬節度使)가 되어 야인(野人)의 언어(言語)․지세(地勢)에 밝음으로써 그들을 성심껏 회유하여 변경을 침범하지 않게 했으며, 그 공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하였다.
1487년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가 되고, 그뒤 대사헌(大司憲)․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 1491년(성종 22) 부원수(副元帥)로 도원수(都元帥) 허 종(許 琮)과 함께 야인(野人) 니마차(尼麻車)를 토평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어서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오르고 이듬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뒤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1495년(연산군1)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99년 왕명으로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서북 제번기(西北諸蕃記)」․「서북지도(西北地圖)」를 찬진(撰進)했다. 이 해 병조 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새로 설치된 비융사 제조(備戎司提調)를 겸직하여 갑주(甲冑)를 만들었으며, 우참찬(右參贊)․우찬성(右贊成)을 지낸 뒤 1505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