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성주이씨시조(星州李氏 始祖),이순유(李純由),오현(梧峴),안산서원(安山書院),봉산재(鳳山齋)

작성일 : 2018-03-14 10:13 수정일 : 2018-03-14 11:00

오현재(梧峴齋)전경(全景)

우리 성주이씨는 신라말로부터 고려조, 조선조를 거쳐, 지금까지 천여 년 동안 전승 번성해 왔으며, 시조는 신라 경상공 휘 순유(純由)이시고, 중시조는 농서군공 휘 장경(長庚)이시다. 농서군공의 묘소는 처음 선석산 비호석봉에 있었으니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이다. 조선조 세종 25년(1443)에 왕명으로 이장(1455~1456)한 곳이 지금의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오현(梧峴)이다. 그 후 재실로 건축한 영모재(永慕齋)는 오랜 세월 보수관리를 거듭했지만 노후되어 유지보존이 어려워 대종회는 1985년 11월 12일(음 10월 1일) 오현재(梧峴齋) 중건사업을 결정하고 1987년 11월 21일(음 10월 1일) 기공식을 가졌으며 시조 경상공의 제단도 설치하여 1994년 11월 3일(음 10월 1일)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오현재에는 시조 경상공의 제단비, 중시조 농서군공의 묘역, 유품전시관, 재실인 영모재와 수호인 숙사가 있으며. 규모는 총 건평 173평, 대지 및 부속전답 2,860평이다.

성주이씨의 연원과 유래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始祖)는 신라(新羅) 문성왕조(文聖王朝, 840~856)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이순유(李純由)로 경주이씨(慶州李氏)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의 32대손(代孫)이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공께서는 신라(新羅)가 망함에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고려조(高麗朝)에 나아가 벼슬하지 않고, 지금의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에 옮 겨 숨어살았으나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인물됨을 아깝게 여겨 “나의 신하는 아니나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하며 호장(戶長)을 삼으니 후손(後孫)들이 대대로 호족을 이루고 살았다.

고려(高麗) 원종조(元宗朝, 1259~1274)에 이장경(李長庚)의 다섯 아드님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나라에 공헌함으로 특별히 삼중대광 좌시중 홍안부원군 도첨의 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 左侍中 興安府院君 都僉議 政丞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하였고,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元)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면서 공적(功續)을 세워 요양성(遼陽省)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됨에 원(元)나라의 황제 (皇帝)가 선칙(宣勅)으로 그의 조부를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추봉함으로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도 했으며, 그 후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향리(鄕里)의 지명을 따라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관향(貫鄕)을 정하게 된 것이다.

조선(朝鮮) 성씨(姓氏) 만성보(萬姓譜)에 의하면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중흥시조(中興始祖)이신 이장경(李長庚) 이후 8世 안에 문형(文衡)이 18명, 봉작(封爵)을 받은 이가 11명, 상신(相臣)이 15명, 또 식읍(食邑)을 받은 이가 5명, 부마(駙馬)가 2명,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는 75명에 달하며,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그리고 음보(藤補)로 출사(出仕)한 분은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는 삼한(三韓)의 큰 성씨(姓氏)로 우리 역사(歷史)의 큰 발자취를 남겨왔다”라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또한 선조님들의 업적을 살펴 볼 수 있는 족보(族譜)는 1464년(世祖9년, 甲申)에 우리 나라 최초로 간행되어 책은 전하지 않으나 이윤손(李尹孫)의 보서문(譜序文)만 전하고 있으니, 이는 현재 보물로 지정 되어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 보다 12년이나 앞서 발간된 것이다.

두 번째로 발간된 1613년 계축보(癸丑譜, 광해5년) 역시 현존하는 우리나라 족보 중 세 번째로 오래된 족보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 세거(世居) 분포(分布)는 고려(高麗) 중·말엽(中. 末葉) 높은 관직에 출사하였던 분이 많았으므로 관직과 연관한 임지를 근거하여 전국 각지에 세거(世居)하고 있으나 맏집인 밀직공파(密直公派) 후손들은 향리인 성주(星州)를 위시한 인근 시군(市郡)에 집 성촌(集姓村)이 많은 것이 특색이다.

1985년 전국 인구 조사 통계에 의하면 남한(南韓)에만 약 153,1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203,703명으로 되어 있다. 1989년에 중앙일보(中央日報)에서 펴낸 “성씨의 고향(姓氏의 故鄕)”에 보면 우리나라에는 275개의 성씨(姓氏) 중 이씨(李氏)는 115개의 본관(本貫)이 있는데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인구로 볼 때 이씨 중 세 번째이다.

오 현(梧 峴)

성주이씨(星州李氏) 중흥시조(中興始祖)이신 농서군공(隴西郡公) 이장경(李長庚)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성주이씨(星州李氏)의 구심점(求心點)이 되는 곳이다.

공의 묘소는 처음엔 지금의 성주군(星州郡) 월항면(月恒面) 인촌리 (仁村里) 선석사(禪石寺) 옆 비호석봉(世宗 王子 胎室이 있는 곳)이었으나 훗날 공의 후손인 가문(家門)이 날로 번창하게 되자 조정의 간신들이 시기하여, 세종(世宗)의 적서(嫡庶) 18왕자의 태(胎)를 봉안한다는 구실을 부쳐 1445년(세종25년) 왕명으로 이장하게 하니 지금의 이곳 성주군(星州郡) 대가면(大家面) 옥화리(玉花里) 오현(梧峴), 공의 부인이신 합주 이부인(陝州 李夫人) 산소 위로 이장(世祖 1~2년경)하게 되었으며 그 후 이곳을 능골(陵谷)이라 부르고 있다.

공께서는 슬하에 다섯 아드님을 두셨으니 밀직사사(密直司事) 백년(百年),참지정사(參知政事) 천년(于年),문하시중(門下侍中) 만년(萬年),개성유수(開城留守) 억년(億年),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이시며 모두들 나라에 공헌함이 커, 공에게 삼중대광좌시중 지전리사사 상호군 경산부원군(三重大匡左侍中 知典理司事 上護軍 京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손자인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서 벼슬하여 요양성(遼陽省)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심에 원의 황제(皇帝)가 선칙(宣勅)으로 그 조부인 공에게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추봉하였다.

유품전시관(遺品展示館) 전경

유품전시관은 1998년 3월 24일 대종회 (大宗會) 총회의 결의에 따라 공사를 시작하여 동년 11월 19일에 개관하였다.

유품전시관(遺品展示館)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자료 제217호로 지정(指定)된 안산영당에 봉안(奉安)된 영정(影幀) 14폭을 사진으로 사본(寫本)하여 전시(展示)하고 있으며, 고려조(高麗朝) 문열공 이조년(文烈公 李兆年) 현조(顯祖) 친필(親筆) 병풍(屛風) 사본(寫本), 1613년(광해 5년)에 간행(刊行)된 계축보(癸丑譜)와 성주이씨 역대(歷代)의 족보(族譜) 15종과, 주옥(珠玉) 같이 찬연한 문집(文集) (陶隱詩集, 亨齋集 등) 50여권을 비롯하여, 선현(先賢)들이 남긴 유품(遺品)들과 전국에 산재(散在)한 원사(院祠)의 사진 48점, 국가에 공헌하신 분들의 비석(碑石)사진 22점, 조선조(朝鮮朝) 명종(明宗)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이언충(李彦忠)의 묘소(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2000년 4월 22일 발굴된 원형(原型) 시신(屍身)의 사진과 부장품인 의류 24점 중 4점을 모조(模造) 전시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숭조사상(崇祖思想)을 일깨우고 선조의 유덕(遺德)을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장(場)으로 활용하고 있다.

안산서원(安山書院)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안산촌(星州郡 碧珍面 紫山里 安山村)에 역대(歷代)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에서 도덕(道德), 경술(經術), 문장(文章), 관직(官職)이 뛰어나 국가에 공헌도(貢獻度)가 높은 현조(顯祖) 22位를 모시고 제향(祭享)하는 서원(書院)이 있는데, 전국에서도 한자리에 그렇게 많은 영정(影幀)을 모신 곳은 없다고들 한다.

이고장 토성인 성주이씨는 고려말에 현창(顯彰)한 분이 많아서 시조 이장경(李長庚),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경원 이포(敬元 李褒), 초은 이인복(樵隱 李仁復), 도은 이숭인 (陶隱 李崇仁), 형재 이직(亨齋 李稷) 등 여섯 분의 영정(影幀)을 국가의 숭봉(崇奉)으로 지금의 성주군 월항면 인촌에 위치한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옆 선석사(禪石寺)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배향(配享)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25년(1443년) 적서(嫡庶) 18왕자의 태를 이곳에 묻게 되어 태실을 만드는 까닭에 산소는 대가면 옥화리 능골로 이장(세조 1~2년경)하고 사당은 지금의 성주군(星州郡) 벽진면(碧珍面) 자산리(紫山里) 안산사(安山寺)로 옮겼으나 그 연대는 미상이다.

그 후 선조(宣祖) 14년(1581) 후손 이현배(李玄培)가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영당(影堂)을 중수하고 제기(祭器) 등을 새로 비치하였으며, 11년 후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적이 침공하여 영정(影幀) 일부를 훔쳐 갔으나 승(僧) 경종(敬宗)이 나머지 영정(影幀)을 잘 수습하여 땅속에 묻어 보관한 까닭에 정유재란의 병화(兵火)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조(宣祖) 39년(1606) 외손(外孫) 이덕온(李德溫)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사림(士林)과 더불어 영당(影堂)을 세 번째로 중수하였으며,광해(光海) 9년 후손 이욱(李稶)이 경향각지의 친족들과 더불어 네 번째로 중수하고 현종(顯宗) 6년(1665) 6칸 신주(神廚)와 4칸 재실(齋室)을 완성하였다.

인조(仁祖) 10年(1632) 경상감사(慶尙監司)의 허가를 얻어 재실(齋室) 동편에 새터를 잡아 유림(儒林)에서 이문환(李文煥), 곽천우(郭天佑) 등이 도감이 되어 영당(影堂)을 새로 짓고 열 세분을 추배(追配)하였으니, 밀직사사이백년(密直司事 李百年), 참지정사 이천년(參知政事 李千年), 문하시중 이만년(門下侍中 李萬年), 개성유수 이억년(開城留守 李億年), 평양윤 이인기(平壤尹 李麟起), 요양성참지정사 이승경(遼壤省參知政事 李承慶), 대호군 이원구(大護軍 李元具), 문하시중 이인임(門下侍中 李仁任), 대제학 이인민(大提學 李仁敏), 경무공 이제(景武公 李濟), 한성판윤 이사후(漢城判尹 李師厚)등이고 이조판서 이욱(吏曹判書 李稶), 정헌공 이광적(靖憲公 李光迪) 등이다.

숙종(肅宗) 6년(1680) 다시 문정공 이지활(文靖公 李智活), 문경공 이항(文敬公 李恒), 사헌부 전중어사 이조(司憲府 殿中御史 李晁) 등 세분을 추배(追配)하고 나라에서 안산서원(安山書院)이란 임금의 친필사액(親筆賜額)을 하사(下賜)받게 되어 춘추(春秋)로 인근 유림(儒林)에서 모여 제사 지냈으나 고종(高宗) 8년(1871)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따라 안산영당(安山影堂)으로 이름을 바꾸는 수난(受難)을 겪었다.

그 후 병진년(1916) 다시 중수하고 영정(影幀)의 감실(龕室)을 구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매년 한식일(寒食日)에 제향(祭享)한다.

서원(書院) 앞에 있는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철종 6년(1855) 경향 각지의 자손들이 뜻을 모우고 후손 종영(鍾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좨주 홍 매산 직필(祭酒 洪 梅山 直弼)이 비명(碑銘)을 짓고 판서(判書) 이응와 원조 (李凝窩 源祚)가 글씨를 썼다.

영당(影堂)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지방(地方)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 제217호로 지정되었고, 영정(影幀) 10위 13폭은 경상북도 유형(有形) 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1988년에 모사(模寫)한 것이다.

또한 7억8천만원의 총공사비로 1997년부터 6개년, 4차에 걸쳐 2003년 3월 21일에 준공한 중수공사로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대종회에서는 2003년 4월 6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이 중수공사는 이해봉(李海鳳) 국회의원과 성주화수회 이시웅(李時雄) 회장의 힘이 컸다.

봉산재(鳳山齋)

성주군(星州郡) 성주읍(星州邑) 경산리(京山里) 봉두산(鳳頭山) 아래 위치한 봉산재(鳳山齋)는 중흥시조 이신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부터 현손(玄孫) 문총공(文忠公) 이숭인(李崇仁)의 대(代)에 이르기까지 이곳에서 살으신 기록들이 경산지(京山誌)에 수록되어 있어 성주이씨(星州李氏) 선대(先代)의 유허지(遺塘地)이다.

경산지(京山誌) 1권 34 쪽에 의하면

○ 龍山里 自城內 實錄閣 舊衛東門以 東爲界 射I殿場傍有 小峯魯出 名曰 鳳頭山 山之前 卽 隅西公 李長庚卿故宅 鳳頭山 舊爲 官家果苑 壬辰廢不復(용산리 자성안에 신록각이 있었고 옛 마을 동문경계에 사후장(궁도장) 적은 봉우리가 용출해 있으니 이름하여 용두산 이라 했다. 그 산 아래에 농서공 이장경경의 고택이 있었다.

용두산에는 관에서 경영하는 과원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후 폐하고 복구하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한편 경산지(京山誌) 1권 36쪽에 보면 ○ 城南岭頭 有南誰館 遺址 其前 李崇仁別業 李崇仁詩 身世縣然水上津 歸來幸 此有紫荊 却將萬里乾坤眼 坐對星山一點靑(성남쪽 산위엔 남아관 유적지이고 그 앞이 이숭인의 공부하던 곳이며 이숭인의 시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와 같은 기록들로 보아 봉두산(鳳頭山) 아래가 농서군공(隴西郡公)께서 살으신 유허지(遺塘地)이며 유허비명(遺塘碑銘)은 후손 교리(敎理) 교인(校寅)이 짓고, 농서군공(隴西郡公) 李先生 유허비각기(遺塘碑閣記)는 공조 판서(工曹判書) 성산(星山) 이원조(李源祚)가 지었으며, 봉산재(鳳山齋)의 기문(記文)은 한림비서원숭겸(翰林秘書院丞兼) 장예(掌禮) 여흥(魔興) 민영회(閔永會)가 지었다. 재실(齋室)에는 농서군공(隴西郡公)의 영정(影禎)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단오절(端午節)에 전국 후손들이 모여 제향(祭享)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