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창원회산황씨(昌原(檜山)黃氏),공희공(恭僖公),황석기(黃石奇),창원황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3-13 21:03 수정일 : 2018-03-13 21:56

시조 및 관향의 연원

창원(회산)황씨시조는 황석기(黃石奇)이다. 시호(諡號)는 공희(恭僖)이고 호는(號) 회암(檜巖)이며 고려 26대 충숙왕(忠肅王) 때 27대 충해왕비(忠惠王妃) 덕영대장공주(德寧大長公主)를 배행(陪行)하여 처음 우리나라로 와서 고려왕(高麗王)으로부터 본관(本貫)을 의창(義倉:지금의 昌原)을 하사(下賜)받아 시조로 모시고 계대(系代)를 이어오고 있다.

창원(昌原)은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쪽에 위치한 산업도시이며 경남도청 소재지이다. 고대(古代) 금관가야(金官伽倻:경상남도 김해지방에 부족국가를 형성하였던 6가야 중의 하나)에 속했었다. 창원은 의창현(義昌縣)과 회원현(檜原縣)의 합명(合名)인데 의창현은 신라의 굴자군(屈自郡)을 경덕왕 때 의안(義安)으로 고치고, 회원현은 신라의 골포현(骨浦縣)을 경덕왕 때 합포(合浦)로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에 속하게 하였다가 1018년(현종 9) 의안․합포를 모두 금주(金州)에 예속시켰다.

그 후 의안은 의창(義昌)으로, 합포는 회원(檜原)으로 고쳐서 모두 현령(縣令)으로 승격하였고, 1413년(태종 13)에는 의창현과 합포현을 합쳐 창원부(昌原府)가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창원군이 되었다. 19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 시책에 따라 창원군의 상남면과 웅남면, 창원면의 일부를 마산시(馬山市)에 편입시켰고 1980년에는 창원시가 되었다.

시조 황석기(黃石奇)는 충숙왕 8년 1339년에 조적의 난(曺頔亂)을 토평(討平)하고 충혜왕 복위 3년 지신사((知申事)에 서임(敍任)되어 추성좌리공신 일등으로 녹훈벽상(錄勳壁上)에 오르시고 원(元)나라에 살고 있던 아버지 보(補)를 모시고 와서 고려왕으로부터 봉작(封爵)과 토전(土田)을 하사 받았다.

충혜왕 5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서연관(書筵官)이 되시고 29대 충정왕(忠定王) 1년 7월에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에 승서(陞敍) 8월에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이 되어 강능군(江陵君: 고려 30대왕이 된 공민왕)이 원나라에 가서 있을 때 1348년 28대 충목왕(忠穆王)이 승하(昇遐)하자 서연관(書筵官)으로 정승(政丞 이제현(李齊賢)과 같이 29대 충정왕(忠定王)의 승습(承襲)을 받으러 갔다가 이제현 공은 돌아오고 공희공은 원나라에 강릉군(江陵君:즉위하여 30대 공민왕)과 같이 있다가 강능군이 원나라 노국대장공주와 혼인(婚姻)을 성사시키고 귀국하자 다시 배행(陪行)하여 우리나라로 왔다.

공민왕 5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경천흥(慶千興)과 더불어 기철(奇轍) 일당을 토주(討誅)하시어 찬성사(贊成事)에 오르시고 관제(官制) 개정(改正)으로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다음해 정월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공(公)은 장남 황상(黃裳)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여 복주(福州)에 파천(播遷)하였다가 다음해 8월 왕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원암역(元巖驛:지금의 보은)에 이르러 이제현 등 원로(元老) 문신(文臣) 6인과 함께 칠로연시(七老讌詩)를 지었다.

9월에는 청주(淸州)에 이르러 왕의 명(命)으로 여러 문신(文臣)과 같이 공북루시(拱北樓詩)를 응제(應製)하였다. 1364년 8월 15일 졸(卒)하였다.

재관(在官) 40여 년 동안 충숙(忠肅), 충혜(忠惠),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恭愍) 등 5왕을 역사(歷事)하면서 많은 위업과 공훈을 세우고 위계(位階)는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에 승서(陞敍)되었다. 공을 추모하는 향사는 음력 10월 10일 함안군(咸安郡) 군북면 모로리 죽산재(竹山齊) 제단(祭壇)에서 제향(祭享)을 올리며 매년 한식일(寒食日) 죽산사(竹山祠)와 신풍리 동산재(東山齋) 世德祠와 함안(咸安) 칠원(漆原) 와룡재(臥龍齋) 회원사(檜原祠)에서 매년(每年) 음력(陰曆) 9月 9日에 추향(秋享)으로 유림(儒林) 봉사(奉祠)하고 있으며 季氏 黃石柱씨(昌原黃氏 大相公 始祖)는 各種 文獻에 의하면 石奇氏의 同生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나타나고 있다.

시조의 아들 황상(黃裳)은 시호(諡號)가 공정(恭靖)이고 고려조 충혜왕 때 호군(護軍)이 되고 1354년 공민왕 초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라 추충익찬공신(推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원나라의 요청을 받고 유탁(柳濯) 염제신(廉悌臣) 정세운(鄭世雲) 최영(崔塋)등과 함께 중국의 고우(高郵) 사주(四州)등지에서 장사성(張士誠)의 난군(亂軍)을 토평(討平)하고 1356년 공민왕 5년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고 1358년 기철(奇轍) 일당(一黨)을 아버지 [석기]公 과 함께 이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공민왕 7년 판추밀원사(判樞院事)에 올라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다.

1359년 중국에서 홍건적이 일어나 홍건(紅巾)으로 취장하고 모거경(毛居敬)을 두목을 삼아 3,000난도가 결빙(結氷)된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義州) 지방을 함락시켰다. 이때 공(公)이 이방실(李芳實)장군 등과 함께 적을 토벌하여 격퇴시켰으나 1361년 다시 홍건적 10만 명이 자비령 방책(防柵)을 부수고 왕도(王都) 개성(開城)을 함락시켰다. 이때 황제는 이천(利川)을 거쳐 복주(福州)로 파천(播遷)하게 되자 공의 아버지 석기(石奇)公 과 함께 왕을 호종(扈從)하고 교주능도(交洲陵道) 도만호(都萬戶)가 되었고 이듬해 정세운(鄭世雲) 안우(安佑) 이성계(李成桂) 최영(崔塋)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인솔하고 홍건적을 대파하여 왕도 개성을 탈환하고 왕이 환가(還駕)하였다.

공은 이러한 공(功)으로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에 올라 호성수복(扈聖收復)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고 참지문하성사(參知門下省事)에 승진한 후 추충분의익찬공신(推忠奮義翊贊功臣)이 되었다. 이에 문하찬성사를 지내다가 사직하고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1364년 (공민왕13년) 동북면 도순토사(東北面 都巡討使)가 되어 역신(逆臣) 최유(崔濡)가 기철 일파를 숙청한 공민왕에 원한을 품고 있던 기황후(奇皇后)를 설득하여 덕흥군(德興君) 혜(譓)를 왕으로 추대하고 선천(宣川)까지 침입하여온 홍건적을 이성계를 휘하 부장(副將)으로 삼고 격퇴하였다. 그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공(功)으로 원나라로부터 봉훈대부(奉訓大夫) 경정감승(經正監承)의 관직을 받고 다시 문하찬성사가 되어 추충분의보리익찬공신(推忠奮義輔理翊贊功臣)에 책록되었다.

1377년(우왕 3년) 의창군(義昌君)으로 피봉되고 서강 도원수(西江都元帥)가 되어 왜구(倭寇)를 방어하는데 공을 세웠다. 공(公)은 무예에 능하고 용맹이 절윤(絶倫)하여 의적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워 역대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특히 궁술(弓術)로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명궁으로 이름을 떨쳐 원순제(元順帝)도 공의 궁술을 관람하고 선차에 격찬하며 칭송했다. 유학(儒學)에도 정려(精勵)하여 당시 성리학자로 유명한 목은(牧隱) 이색(李穡)과도 교우(交友)가 깊었으며 유교적 윤리관에 있어서도 이승로(李承老) 이목현(李牧玄) 형제와 더불어 유교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382년 우왕 8년에 졸하였다.

공을 추모하는 향사는 음력 10월10일 함안군(咸安郡) 군북면 모로리 죽산재(竹山齊) 제단에서 제(祭)을 올리며 매년 한식일 죽산사에서 유림봉사(儒林奉祀)하고 또한 진주 동산제 세덕사(世德祠)와 함안 칠원 와룡제 회원사(檜原祠)에서 매년 음력 9월9일 추행 유림(儒林) 봉사하고 있다.

 

황윤서(黃允瑞) 공정공 상(裳)의 자(子) 윤서(允瑞)는 자가 국보(國寶) 호(號)는 공의(恭義)이다.

고려 충목왕 1년 1345년생 음사(蔭仕)로 고려(高麗)에서 판사농(判事農) 형조(刑曹) 참의(參議)였으나 공정공이 1383년에 졸하고 9년 후에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관직(官職)을 그만두고 조선불복지신(李氏朝鮮不服之臣)으로 6년을 은신(隱身) 중(中)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매제(妹弟)인 박포(朴苞)공이 방간(芳幹)을 옹립하고 방원(芳遠:후에 태종)을 멀리하여 기병(騎兵)을 일으켜 방원과 싸워 1400년에 역모(逆謀)로 참수(斬首)되었다.

그로 인해 처남인 윤서(允瑞)공도 하장지화(荷杖之禍)를 당하여 은거 생활을 하면서 장자 구(玖)와 차자 진(珍)을 데리고 진주 방어산(防禦山)으로 와서 구(玖)는 군석(君碩)으로 개명(改名)하여 피신(避身)하게 하고 차자 진(珍)은 방어산 서쪽으로 은거케 하니 형제와 자식 두 명이 생이별하여 은거(隱居)하는 길이 가정을 보존하는 길이다 하였다. 공(公)은 황해도(黃海道) 수안군 공포면 지내리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서 미성년(未成年)의 자(子) 4명을 데리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다가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와 함께 하장지화를 당하였다.

공의 장자 구(玖)는 군석(君碩)으로 개명(改名)하여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으로 고려말에 상제(裳制)의 예법이 대양(大壤)하였으나 공(公)은 여막(廬幕) 3년으로 종제(終制)하였다.

공의 차자 진(珍)은 호가 수은(遂隱)이고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일찍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 수학(修學)하여 영재(英才)로서 지사사(知司事)에 올라 명성을 떨쳐 1391년에 지부사(知部事)에 올랐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불복지신이므로 개풍 광덕산(開豊 光德山)에 은둔하니 망복(罔僕)하는 충의(忠義)의 선비가 운집(雲集)하였다. 이때가 왕자의 난이 일어나 진주 방어산을 서쪽에 은신(隱身) 중 구원(丘園)에 유연류랑(留連流浪)하다가 조부 공정공이 현몽(現夢)하여 말하기를 "너는 급히 여강을 건너 와룡산으로 내려가라" 하였다. 아들 형제를 창원 에 두고 딸 둘만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와룡산 기슭에 살면서 동네 이름을 신복(申伏)이라 하였다.

공의공께서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효우(孝友)는 가문을 보전하는 근본이 되고 충신은 처세(處世)의 도리가 된다. 난세의 생애는 문호를 보존할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유훈(遺訓)을 이어서 은둔 생활로 생(生)을 마쳤다.

공의 3자 현(玹)은 아버지와 함께 황해도 수안군 공포면 지내리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서 은거생활(隱生活)을 하다가 부모가 함께 하장지화를 당하자 미성년자(未成年子)인 공은 개명(改名)도 아니하고 은거하여 이곳 저곳을 옮겨 살았기 때문에 묘(墓)는 태봉산(泰封山)에 있고 아들 규(奎) 부사공(府使公)의 묘소는 기풍(岐風)에 있고 손자(孫子) 서(緖)부터 14세까지 실묘(失墓)되고 15세부터 26세까지 여러 곳으로 살면서 대부분 참살되고 1979년 정미보에는 20여호가 동보(同譜)를 하였다.

공의 4자 괴(璝)는 을구(乙耈)로 개명하고 제안(齊安)을관향(貫 鄕)으로 받아 제안황씨로 분관하였다. 제안황씨 족보에 의하면 선조에 “석기, 상, 윤서 을구, 하준 이라 하고 아우 석주는 이거(移居) 상주(尙州)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제안공 을구의 손자 인(絪)을 1세로 하고 증손 유선(維善)을 2세로 석영을 3세로 처상(處裳)을 4세로 세보를 편찬하고 있다.

괴() 개명 을구(乙耈)의 장자 유지(有智) 초휘(初諱) 하인(河仁)의 후손은 昌原(檜山)을 관향으로 하고 차자(次子) 하신(河信) 3자 하청(河淸) 4자 하응(河應)의 후손은 상주(尙州)를 관향으로 하며 5자 하준(河峻)의 후손은 제안 황씨로 세보(世譜)를 달리 속간하고 있다. 이는 고숙(姑叔) 박포공이 역모로 참수 당하였기 때문에 살아 남기 위하여 장자 하인(河仁)은 유지(有智)로 개명(改名)하여 은거하였고 차자(次子)부터는 관향(貫鄕)을 달리하여 하장지화로 인해 독살을 피하기 위하여 세보(世譜)를 달리 속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의 상계(上系)를 살펴보면 장자 유지(有智) (檜山派)의 3자 인(裀)과 제안공파 하준(河峻)의 자 인(裀))이 같은 사람입이다. 양 문중의 세보에 “인(裀) 중전대부(中典大夫) 호조전서”가 같고 인(裀)의 손자(孫子)도 양파(兩派) 세보(世譜)에 “석령(碩齡)”이며 배위(配位)도 “숙인(淑人) 한씨(韓氏)” 묘도 “합폄(合窆)”으로 같은 곳이다.

공희공 증손 “괴() 개휘(改諱) 을구(乙耈)”와 제안 황씨 시조 “괴() 개휘(改諱) 을구(乙耈)”는 “문과에 급제 소윤(少尹)과 이조(吏曹) 참판(參判)을 역임하고 원훈(元勳)으로 제안군(齊安君)에 봉작(封爵)되었다.” 묘는 “황해도 황주군 제안면 성북리 독산(獨山) 간좌(艮坐)”도 같다. “유갈중간(有喝中間)에 실전(失傳)되었다가 광무(光武) 2년 봄에 후손 석헌 중학(錫憲 鶴)이 지석(誌石)을 채득하여 그 실정을 관(官)에 재소 압장총(壓葬塚)을 발굴하고 옛 묘 봉영을 개수후(改修後) 묘갈(墓喝)을 다시 드렸다.” 하는 것도 같다.

상주 황씨 족보에도 4세 을구는 문과(文科) 관(官) 소윤(少尹) 이조(吏曹)참판(參判) 제수되었다. 관향을 달리하는 상주황씨세보와 제안황씨世譜를 보면 괴(王貴)) 초휘 을구(乙耈)라 하였으나 구(玖), 진(珍), 현(玹), 괴(王貴,) 선(璿), 수(琇) 6형제가 구술옥 변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군석(君碩)과 을구(乙耈)는 개명이지 초휘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공의 5자 선(璿)은 개명도 하지 아니하고 은거(隱居)하였기 때문에 고숙(姑淑) 박포(朴苞)공이 역모로 참수되고 하장지화(荷杖之禍)를 당하여 자손이 참살되어 사는 곳을 알 수 없으나 생존한 후손들은 함경도(咸鏡道) 지방에 거주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의 6자(子) 수(琇)는 자(字)는 화원(華元)이고 어려서 부모가 박포(朴苞)공의 하장지화로 인하여 참살(斬殺)되고 개명도 하지 아니하고 황해도에서 이곳저곳으로 은거하여 살면서 충청도로 경상도로 피신하여 살았으나 지금은 경남(慶南) 고성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시조(始祖) 석기(石奇)의 차자(次子) 창(昌)은 정순대부 지평주사를 역임하고 통훈대부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창의 아들 선경(善慶)은 대흥(大興)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가선대부 병조(兵曹) 참판(參判)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었고 아들 4형제를 두었고 장자(長子)는 인헌(仁軒)이고 차자(次子)는 의헌(義軒)은 문과에 등과하여 이조(吏曹) 참의(參議)를 역임하고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제거(除去)하려다 참수(斬首)되었고 3자(子)는 예헌(禮軒)이고 병조(兵曹) 판서(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4자(子) 지헌(智軒)은 사정(司正)을 역임했으나 계유정란에 형제 4인이 모두 화를 당한 충신의 집안이다.

공의 후손은 3만여(萬餘) 명(名)에 이르고, 정2품 관을 역임하고 증시(贈諡)와 녹훈(錄勳)된 후손(後孫)으로 공의 증손(曾孫) 장무공(莊武公) 위(衡), 장무공의 손자(孫子) 민익공(敏翼公) 대수(大受), 문민공(文敏公) 신(愼), 신(愼)의 아들 충열공(忠烈公) 일호(一皓) 등이 있고 이분들은 모두 창원황씨를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만든 선조(先祖)들이다.

이후(以後) 조선조에서도 증우의정 대수(大受),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침(琛), 이조(吏曹)판서(判書) 대임(大任), 좌찬성(左贊成) 치성(治誠), 관찰사(觀察使) 기(琦),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덕민(德珉), 공조(工曹) 판서(判書) 준(晙) 등은 관계(官界)에서 협(俠)과 열(悅) 등은 학계(學界)에서 가문(家門)을 빚내었다.

한말(韓末) 국치(國恥) 이후(以後) 많은 의병(義兵)과 애국지사(愛國志士)와 독립운동(獨立運動)가를 배출하였다.

건국(建國) 이후(以後)에는 고위 관료와 국회의원(國會議員) 등 다수(多數) 배출했으며 특히 황남팔(黃南八 ) 3. 5.대 국회의원을 지나면서 중앙종친회를 결성하고 숭모목종의 정신을 고취 시키는데 한국황씨의 최고의 모범수훈을 세웠으며 국회농림분과 위원장을 역임했고 다음으로 황영시(黃永時)가 사성(四星) 장군(將軍)으로 육군참모총장과 감사원장을 역임했고,황산덕(黃山德)씨는 서울대법학 교수로서 국회의원 문교부장관 법무부장관 등을역임 황산성(黃山城)이 여성(女性)으로서 명판사 국회의원 환경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학문분야에 황우석(黃禹錫)이 세계최초로 난자를 이용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 기여를 하였고. 황우익(黃祐翊)은 고려 인삼에 항암작용이 있다는 것을 세계최초로 세계인삼학술대회에서 연구 발표하여 우리 나라의 국위를 세계만방에 떨쳤다.

제안공 후손으로 황순원씨. 황순필 회장의(형제)와 그의 아들 황인규부장검사, 황병덕 법학박사. 황적인 법학 박사. 황적화 명판사. 황상일 회장. 등 많은 인물이 있으나 분파 관계로 등재지 못함을 애석하게 생각되며 이분들은 모두 창원(회산)황씨가 배출한 자랑스런인물이며 문중을 빛낸 분들이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창원(회산)황씨 종친은 전국에 78,895가구 252,81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 인물 - 창원황씨조상인물

고려조(高麗朝) 인물(人物)

황 상(黃 裳) : 시조 고려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회산부원군 석기(石奇)의 장자이다. 충혜왕 때 호군(護軍)이 되고 1354년 공민왕초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라 추충익찬공신(推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찬성사 상의(贊成事商議)에 올라 호성수복(扈聖收復)의 일등공신이 되고 참지문하성사(參知門下省事)에 승진한 후 추충분의 익찬공산(推忠奮義翊贊功臣)이 되었다. 이에 문하찬성사를 지내다가 사직하고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황 창 (黃 昌) : 정순대부 지평주사를 역임하고 통훈대부 형조(刑曹)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황윤서(黃允瑞) : 공정공 상(裳)의 자이다. 자는 국보(國寶) 호(號)는 공의(恭義) 고려 충목왕 1년 1345년생 음사(蔭仕)로 고려(高麗)에서 판사농(判事農) 형조(刑曹) 참의(參議)였으나 공정공이 1383년에 졸(卒)하신지 9년 후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官職)을 그만두고 조선불복지신(朝鮮不服之臣)으로 황해도(黃海道) 수안군 공포면 지내리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서 미성년자(未成年子) 4명을 데리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시다가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와 같이 죽음을 당했다.

황선경(黃善慶) : 평주공 황창(黃昌)의 자(子)이고 봉훈랑 대흥 현감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兵曹) 참판(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었다.

황군석(黃君碩) : 초휘(初諱)는 구(玖) 자(字)는 성로(聖老) 호는 명은(明隱). 1363년 공민왕 12년생 공의공 (恭義公) 휘 윤서(諱 允瑞)의 여섯아들 중 장자이다. 고려말에 상제(裳制)의 예법이 대양(大壤)하였으나 공(公)은 노막(盧幕) 3년으로 종제(終制)하였다.

이조참판 제수 공정공(恭靖公)이 1383년에 別世하신지 9년후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등국하니 이조불복지신(不服之臣)으로 관직을 버리고 은신중 6년이 되던 1398년 왕자(王子)의 난이 일어나

조부 공정공의 사위이며 공(公)의 고숙(姑婌)인 박포(朴苞)공이 방간(芳幹)을 옹립하고 방원(芳遠)후에 태종을 멀리하여 기병(騎兵)을 일으켜 방원과 싸워 1400년에 역모로 박포공이 참수(斬首)되었다.

그 당시 국가에 반역하는 자는 삼족을 참수하는 때라 처조카인 구(玖) 명은공(明隱公)이 이씨조선불복지신인데다가 하장지화까지 당하여 아버지 공의 공 휘 윤서(諱 允瑞)께서 방어산으로 은신케하고 효우(孝友)는 가정을 보존하는 근본(根本)이 되고 란세(亂世)의 생애는 문호(門戶)를 보존하는 것이 도리다 하는 아버지 공의공의 말씀을 깊이 새겨 형제자매와 생이별 진주 방어산에서 은거(隱居)군석(君碩)으로 개명하여 공정공(恭靖公)의 후손이 아닌것처럼 생활하여 자손들이 하장지(荷杖之)화를 면하게 되었다. 묘는 진주시 지수면 상사리 묘(卯) 좌 쌍분이다. 

황 진(黃 珍) : 자(字)는 성일(聖日) 호는 수은(遂隱)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 수학(修學)하고 지사사(知司事)에 올라 명성을 떨쳐 1391년에 지부사(知部事)에 올랐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이조불복지신이므로 개풍 광덕산(開豊 光德山)에 은둔하였다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진주 방어산을 서쪽 에 은신하였다.

황 현(黃 玹) : 윤서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황해도 수안군 공포면 지내리 선영(先塋)이 있는 곳에서 은거생활(隱生活)을 하다가 부모가 왕자의 난에 하장지화를 당하여 죽게되고 이곳 저곳을 옮겨 살면서 은거했다.

황 괴(黃 ) : 윤서의 넷째 아들로 을구(乙耈)로 개휘(改諱)하고 황해도 황주군 제안면 성북리 독산에 은거하여 살다가 제안군에 피봉(被封)되어 관향(貫鄕)을 제안(齊安)으로 받아 제안황씨 시조가 되었다

황 선(黃 璿) : 윤서의 다섯째 아들로. 개명도 하지 아니하고 은거(隱居)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거주하는 곳을 알 수 없으나 함경도(咸鏡道) 지방에 거주한다고 되어 있다.

황 수(黃 琇) : 자(字)는 화원(華元)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윤서의 여섯째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父母)가 하장지화로 인하여 참살(斬殺)되고 개명도 하지 아니하고 황해도에서 이곳저곳으로 은거하면서 충청도(忠淸道)로 경상도(慶尙道)로 피신(避身)하면서 살았으나 지금은 경남(慶南) 고성에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조선조(朝鮮朝) 인물(人物)

황길도(黃吉道)(1388~?) : 자(字)는 덕겸(德謙)이고 구(玖)의 아들이다. 조선조(朝鮮朝)에 보승별장(保勝別將)으로 동해와 남해에 왜구(倭寇)의 침입을 봉쇄해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다.

황 준(黃 濬)(1415~1483) : 자(字)는 도여(導汝) 호는 도은(道隱)이고. 진주 방어산 하 본제(本第)에서 출생, 시조 석기(石奇)의 6세손으로 학문을 좋아하여 성현(聖賢)의 경전(經典)에 잠기어 침식을 잊고 전적으로 공경과 의리(義理)의 학문에 힘쓰니 일생의 수용이 경직의방(敬直義方) 네 글자뿐이었다.

천성이 명민하고 조행이 강직하여 당시 사대부들이 다 추중(推重)하였다. 1451년에 문과에 장원하고 문학이 심조하고 임금의 사랑이 두터웠다. 당시 경기도와 황해도는 역질이 들어 백성이 많이 죽으니 천제(天祭)를 모시기 위하여 왕이 친히 제문을 지어 공(公)을 보내어 제를 올리게 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나면서 치적(治積)이 특이하니 왕이 아름답게 여겨 관복 한 벌을 하사(下賜) 하였다.

1453년에 서해 방면 순찰사(巡察使)로 임명(任命)되어 성심으로 무마하면서 역질의 병폐를 개혁하니 백성들이 모두 안전(安全)을 얻게 되었다. 1456년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으로 들어와 쌓인 안건(案件)들을 시원하게 처리하니 밀린 소송사건이 없었다.

세조(世組)가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생육신(生六臣) 조려(趙旅)와 같이 방산(防禦山)하로 돌아와 시조(始祖) 공희공이하 오대조부모(五代祖父母)님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올리며 선영의 묘가 황해도 수안군 공포면 지내리에 있어 자주 묘전(墓前)에 참배하니 당시 사람들이 높이 추존(推尊)하였으며 진주(晉州) 함안(咸安) 젊은이들을 訓導하시다가 1483년 성종(成宗) 4년 계묘(癸卯)에 졸(卒)하니 군서(郡西)쪽 죽산(竹山)석현에 예장(禮葬)하였다. “온 나라에 어짐이 셋이라 공자(孔子)는 일컬었네 "죽어서나 살아서나 어짐은 같을 세라 모두다 이룬 것은 한낱 어짐 뿐이로다. 기자(箕子)는 어둠을 밝히었고 바른 일을 지켰으니 명이(明夷)라 일컬었네 선생은 그와 같이 우뚝이 높았으니 백이런가 명이런가 죽산(竹山) 석현산에 넉자 무덤이 있으니 내 비에 명을 하여 영원히 가르친다”고 하였다. 도은사(道隱祠)와 세덕사 (世德祠)에 배향되었다.

황 리(黃 离)(1450~1506) : 자(字)는 찬명(贊明) 참의(參議) 좌윤공(左尹公) 준(濬)의 자(子)로 선락장군(宣略將軍) 호분시위사좌령호군참의(虎賁侍衛司左領護軍參議)를 역임하시고 중종(中宗) 원년(元年) 병인(丙寅)에 홍경주(洪景舟)와 더불어 나라에 많은 공훈(功勳)을 세웠다.

황인헌(黃仁軒) : 참군을 역임했다. 동생인 義軒이 世組의 不義를 토벌하기 위한 계획이 사전에 탄로되어 피화(被禍)되자 연좌(連坐)의 禍를 당하여 적몰(籍沒)되었다.

황의헌(黃義軒) : 세종 24년 친시(親試)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종부시 판관, 이조정랑 좌승지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지 이조참의와 안악 군수를 역임 중 안평대군과 모의하다 발각되어 강화에서 체포되어 순직하였으며 형제 처자가 모두 화를 입었다. 그 후 正祖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영월 장능에 별단을 설치하고 제향(祭享)하였으며 묘소는 없으므로 강화 교동에 설단하고 비문을 세웠다.

황예헌(黃禮軒) : 중직대부 선공감(繕工監) 정(正)을 역임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황지헌(黃智軒) : 사정(司正)을 역임하고 중형(仲兄) 안악공이 계유년 화(禍)에 연좌되어 경북 영천에 적거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황 형(黃 衡)(1459~?) : 字는 언평(彦平), 성종 11년 1480년 21세에 무과와 진현시에서 장원 급제하고 상서원 판관에 서임되었으며 성종 병오 1486년 27세에 무과 중시에서도 장원급제를 하니 성종께서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장수라 기뻐하시면서 경서(經書) 한 질을 하사하셨다.

그 후 혜산진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제수(除授)되어 국경을 침략하는 북방 오랑캐를 진압하고 훈련원(訓練院) 도정(都正) 의주(義州) 부윤(府尹)을 역임 중 함경도, 경상도, 병마절제사에 제수되어 함경도 지방 야인(野人)들이 갑산 창성 등지에 침입하므로 순변사(巡邊使)로서 반란군을 진압하고 평안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중종(中宗) 5년 1510년 三浦等地에서 외적의 병선 수백 척이 침략하므로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외적을 대파소탕하고 경상도 병마절도사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겸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를 거쳐 공조(工曹) 판서(判書)에 제수(除授)되었다. 이와 같이 南東西北의 國境을 침략하는 적들을 30여 년 간이나 남정북벌(南征北伐)로서 국가(國家)를 平定한바 있는 名將錄 19人 中 1인이다. 시호는 莊武다 강화 장무사(莊武祠)에 배향되었다.

황 찬(黃 瓚) : 통훈대부 사첨시(司瞻寺)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황 침(黃 琛) : 자(字)는 헌지 연산군 7년 1501년 무과에 급제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북병사를 역임 후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漢城) 판윤(判尹) 겸(兼)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에 서임(敍任)되어 선정(善政)을 베푸셨다.

황 유(黃 瑜)(1488~?) : 안흥 첨사,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에 증직(贈職)되었다.

황 원(黃 瑗)(1492~?) ; 자(字)는 문보 성종 23년 1492년생 조산대부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황 기(黃 琦)(1498~?) 호(號)는 월포, 중종(中宗) 19년 1519년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승정원(承政院) 좌우(左右)승지(承旨) 도승지(都承知)를 거쳐 가선대부로 대사간(大司諫) 공조(工曹) 참판(參判) 및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황 우(黃 瑀)(1516~?) 무과 급제 후 여산 부사 역임하였다.

황세철(黃世喆) : 호는 남아 임진왜란 시 運官이 되어 力戰하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순직하였다.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증직(贈職)되었다.

황대임(黃大任)(1528~?) 별제(別提)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歷任)한 후 이조(吏曹) 판서(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황대유(黃大猷)(1530~?) 통훈대부로 군자감과 상주(尙州)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황대수(黃大受)(1534~1571) : 자(字)는 사겸,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工曹)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1868년 선조(宣祖) 왕위(王位) 계승일에 주서(注書) 재직(在職) 시(時) 돌발사태에 선처하여 직책을 완수함므로서 有名하며 경차관(敬差官)으로 영남도에 부임 도중 승주 객사에서 급서하니 향년 38이였다.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민익(敏翼)이다. 부여(夫餘) 창강서원에 배향되었다.

황 신(黃 愼)(1562~?): 호는 秋浦, 明宗 17년 1562년 宣祖壬牛에 司馬試에 급제하고 알성(謁聖) 문과(文科)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호조(戶曹) 판서(判書)를 역임하면서 20여 년간 재임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난(國難)의 평정(平定)과 전후(戰後) 수습(收拾)을 위하여 국내외(國內外)에서 구국(救國)제민(濟民)의 일념(一念)으로 진충(盡忠)갈력(竭力)하다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옹진 적소에 유패 중 서거하시니 향년 56세다.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또한 율곡(栗谷) 우계(牛溪) 양(兩) 선생(先生)에 사사(師事) 도덕(道德)과 문장(文章) 및 충효(忠孝)대절(大節)이 일세(一世)에 탁월하여 선묘조(宣廟朝)의 명신(名臣)에 추중(推重)되였다. 특히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갈 때 풍랑(風浪)을 서해문으로 진정시켰음을 世人들은 감탄하게 했다. 부여 창강서원에 배향되었다.

황일호(黃一皓)(1588~? ) : 호는 지소(芝所) 임천(林川) 군수(郡守)를 역임 후 대과(大科)에 등과(登科)하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독전어사(督戰御使)로서 위훈(偉勳)을 세우고 의주(義州) 부윤(府尹)과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겸 청북(淸北) 방어사(防禦使)를 역임하였다.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左贊成) 겸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의주(義州) 현충사(顯忠祠)와 강화(江華)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황치성(黃致誠)(1543~?) : 호는 경제,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알성시(謁聖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한 후 삼사(三司)를 거쳐 승정원(承政院) 승지(承旨) 겸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했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兼)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증직되었다.

황용정(黃用正)(1527~?) : 字는 유직 무과(武科) 급제(及第)하고 정략장군(定略將軍)과 절충장군(折衷將軍)에 이어 평안도(平安道) 병마(兵馬)우후(虞侯) 겸(兼) 안주(安州)절제사(節制使)와 위원(謂原) 군수(郡守)에 서임(敍任)되어 안치(鞍峙)전투에서 반군(叛軍)을 대파(大破)하여 평정(平定)한 후 호남(湖南)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역임하므로 30여 년간의 재임(在任) 중(中) 많은 공훈을 세웠다.

황자용(黃子龍)(1568~?) 호는 벽룡담(碧龍潭) 임진왜란 때 공훈(功勳)으로 절충장군(折衷將軍)에 올랐으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조정(朝廷)에서 생정문(生旌門)을 세웠다. 또한 중국 조정으로부터 특출한 효자의 추천요청이 있어 공(公)을 추천하므로 명성이 中外에 떨치었다.

황원옹(黃元雍)(1380~?) : 성리(性理) 경적(經籍)을 박습(博習)하고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等)과 강질(講質)하며 조선(朝鮮) 태조(太祖) 6년(年) 1397年에 保務郞將을 받고 太祖 7年 1398年에는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을 승명(承命)하여 유생(儒生)들을 강습(講習)하셨다.

황 총(黃 總)(1406~?) :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관계(官界)에 나가서는 직장동전(直長同正)에 이르시다.

황유명(黃有明) : 조선(朝鮮) 세조(世祖) 7연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세조(世祖) 8년 1463년에 절제사(節制使) 양정(楊汀)과 같이 오랑캐를 진압하여 정략장군(定略將軍)을 제수(除授)받고 병조(兵曹) 참판(參判)을 증직(贈職)되었다.

황육운(黃陸雲) : 성종(成宗) 12년 1481년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풍기(豊基) 군수(郡守)와 조산대부(朝散大夫) 호조(戶曹)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황석건(黃碩健)(1463~1520) : 호(號)는 고산(孤山)이고 성종(成宗) 9년 무술(戊戌) 1478연에 창원부(昌原府) 서월대(西月臺)에서 칠원현(漆原縣) 유동(柳洞)에 시거(始居)했다. 성종(成宗) 23년 壬子 1492年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배(拜)하고 남해(南海) 현령(縣令)으로 역임하고 民淸簡하여 郡民들이 遺愛碑를 세웠으며 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황윤의(黃允義)(1491~?) : 字는 聖達, 號는 晦窩,, 공(公)은 어려서부터 재질(才質)이 총명(聰明)하여 8세(歲)에 교우(交友)의 범절(凡節)이 어른과 다를 바 없으셨다. 관로(官路)에는 뜻이 없으시나 課學에는 勤勉하시었다. 父母任이 病이 드니 손수 대변을 거두고 장례(葬禮)를 치르고는 묘(墓) 곁에 여막(廬幕)을 치고 삼년을 봉향(奉享)하였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달(通達)하여 만년(晩年)에 三高台에 七樹亭을 구축(構築)하고 벗과 더불어 悠悠自適하시니 士友들이 추중(推重)하였다..

황 우(黃 瑀)(1514~?) : 字는 興瑞, 號는 日新齊, 경서(經書) 사기(史記)에 潛必하고 孝心이 두터워 八歲에 母親喪을 當하여 執喪함에 있어 어른에 비길 바가 없고, 前後國喪을 當함에 있어 小食素服으로 節義를 다하니 忠子로서 천명되어 敬陵參奉에 除授되었다. 職責을 誠實히 完遂하니 임금으로부터 表賞이 내려졌다.

황여필(黃汝弼)(1535~?) : 字는 殷善, 號는 新圃, 幼時에 天聰이 경오하여 學文을 배움에 督鞭치 않아도 學文이 날로 進就하였다 學文眞理를 터득하게 되자 性理學에 全念하고 四字心經近思錄 朱子書에 能하셨다. 山水 의락에 뜻을 붙여 豊湖 언덕 위에 新圃亭을 建立하고 학문(學問)을 후진(後進) 양성(養成) 교도(敎導)에 지대(至大)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정언(正言) 성산(星山) 이택환(李宅煥)이 찬(撰)한 행장(行狀)이 有함.

황종복(黃宗複)(1562~?) : 字는 胤卿, 號는 葛村, 8歲에 小學을 通達하면서 道理는 이 冊에 있다 하고 孝行이 至極하여 大人으로부터 稱頌이 자자했다. 父母喪을 當함에 있어 葬禮를 치르고 墓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三年喪을 奉享했다.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황경헌(黃景憲)(1540~?) : 字 仲度. 武科에 及第 宣傳官 訓練院 僉正에 올라 壬辰年에 왜병이 침입하여 嶺南이 무너지니 義兵을 일으켜 晉州城을 지키는데 큰 功勳을 세웠다. 서울이 함락되고 王이 義州로 피란함을 듣고 王을 호송하려고 義州로 가던 중 중간에서 王을 만나 숙직 호위하였다.

丁酉재란이 일어나서 王이 크게 근심하여 王이 남쪽을 내려가 晉州城을 지키고 적(敵)을 討伐하도록 命하니 내려와 체찰사(體察使) 李元翼을 보고 병기와 군량을 요청 천향산을 굳게 지켰다. 朴恩謙 李魯와 함께 힘써 여러 고을에서 功을 세우고 晉州城이 함락되니 公이 趙宗道 朴惺과 함께 순찰사 鶴峰 金誠一을 조곡하고 두루산 下에 禮葬하였다. 8月에 황석산성이 함락되고 三嘉天香山城에서 일진일퇴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宣武原從功臣錄 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황정일(黃精一)(1548~?) : 字는 仲이고, 號는 安道齋. 恭僖公 12世孫 어려서부터 聰明이 絶倫하시고 孝誠이 出象하시었다. 7歲 時 六년간에 양친(兩親) 상(喪)을 계속 당하여 居喪節次와 諸般凡節이 成人도 미치지 못하게 되니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스승 文康公 장현광이 그의 子侄에게 命하여 備忘錄에 記錄도록 한 事實이 同문학 윤송 趙臨道의 就正錄에 기재되어 있다. 公이 學業에는 成功하였느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으시고 性理學을 探究하여 行과 後學 敎導에 專力을 다하시었다. 孝行으로 南臺 持平을 贈爵받았다.

황덕민(黃德民)(1579~?) : 字는 子逸 어려서부터 孝誠이 지극하여 14歲 時에 居喪凡節이 어른과 다를 바 없었다. 壬辰倭亂이 일어나 그 해 4月 倭軍이 침입하여 집으로 들어오는데 公이 父親喪을 당하여 영구를 받들고 방성통곡하니 적(敵)이 기이하게 여겨 물러가게 하였다. 公이 조용히 三從祖 僉正公 景憲에게 대부님은 임금의 사랑이 두터운데 왜 의병을 모아 적을 討伐하지 않으시오 하니 僉正公이 내 이미 한 번 죽음으로서 나라에 보답할 계획이 되어 있다 하여 晉陽에서 義兵을 일으켰다.

三從祖父 僉正公이 의병을 모아 出戰하게 되자 母親을 입으시고 從軍을 하는데 朴思謙 李魯 等이 그 孝誠에 감동되어 魚肉 등을 進供하였다. 丁酉亂에 僉正公이 天香山城에 布陣하니 公이 從軍을 하면서 都體察使 李元翼에게 書狀을 보내어 兵力 보급을 요청하니 兵力 2,000名을 公에게 給與하는지라 僉正公과 함께 黃石山城에 주둔 倭寇와 싸우다가 僉正公이 殉節하시고 金烏山城으로 진지를 옮겨 병력을 補完하고 亂民을 救恤하시었다. 公은 忠孝를 兼하시고 99歲의 長壽를 누리고 大老로서 從二品 嘉善大夫 漢城府 判尹에 陞敍되었다.

황 도(黃 都)(1595~?) : 字 士城 號는 松皐. 末職으로 통정대부 형조 참의 증직(贈職) 진주 新豊 豊湖江邊에 松皐亭을 建立하고 후진 訓導敎育에 多大한 功勞가 큼. “아! 恭僖公은 공을 세워 천양했네. 행위는 숨기고 자취는 아름다워 대대로 유덕을 밝혔도다. 그 끼친 운수 불꽃같은데 日新齊新圃葛村의 덕업을 公이 잘 이었네. 학을 연구하고 백세향수하여 수직을 받았도다. 거령산 언덕에 봉분이 우뚝하니 이곳을 지나는 자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요.”

황 완(黃 琓) : 字는 公潤이며 司直公 愼齊 周世鵬 先生과 道義로서 사귀시고 孝行이 卓異하사 여묘(廬墓) 3年을 지내고 관계는 충순위로서 오위에 사직을 역임했다.

황사겸(黃士謙)(1527~1582) : 愼齊 周世鵬에게 學問을 닦으셨고, 文學 德行으로 태학관에 추천되어 通禮院 인의(引儀)에 제수되었고, 文敏公 愼齊 周世鵬 先生께서 "敬"字와 詩를 주셨다.

황여지(黃汝址)(1544~?) 字가 佰周이며 號는 柳皐이다. 壬亂을 當하여 僉正으로 출정하여 戰地에서 殉節했다. 功臣錄券이 有하며 三忠碑가 세워졌다.

황여탄(黃汝坦)(1545~?) : 字는 仲平이요, 號는 陽享이다. 宣祖 때에 壬亂을 當하여 伯兄 僉正公 汝址를 따라 출전하여 같이 戰址에서 殉節하셨다.

황여식(黃汝埴)(1548~?) 宣祖 13年 庚辰 1580年에 예빈시(禮賓寺) 參奉을 지내셨다.

황원록(黃原錄)(1581~1618) 字는 公記요 號는 忍軒이다. 學行이 높고 忠孝心이 敦篤하시어 士友들이 推重하셨다. 通政大夫 장사원 判決事에 증직(贈職)되었다.

황 협(黃 俠)(1606~1680) : 字는 樂夫요 호는 獨梧堂이며, 어릴 적부터 資質이 超凡하고 氣象이 卓越하여 門當夫老들의 寵愛를 받았다. 光海8年 丙辰 1616年 11歲때 父를 따라 昌原鄕校에서 글짓기 試驗에서 等參하여 儒生들을 놀라게 하였다. 治家에 家訓九箴으로 家道를 세우셨고 學問을 하되 科擧工夫는 힘쓰지 않고 修己治人에 專心하니 門前에 出入하는 모든 사람들이 感化되어 汝南顔淵이요, 관서부자라 稱頌하셨다. 壬辰兵亂에 불탄 德淵書院을 重建하고 退溪 李先生 聖學十圖를 手慕하여 十圖屛을 지어 常目의 資를 삼았다. 門下儒生들이 德淵書院과 상봉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황 열(黃 悅)(1616~1681) : 字는 慶夫요 號는 退休堂이며 孝宗 2年 辛卯 1651年에 무과에 급제하여 行宣傳官과 五衛都摠府 部事역임하고, 出爲 別僉使하시다 落鄕하시어 정자를 짓고 洛東江 오른편에 현판을 00이라 하였다. 鄕道士林들이 柳溪祠와 00書院에 奉享하다.

황 이(黃 怡)(1618~1695) : 字는 乃亨이고 號는 杜隱이다. 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시고 벼슬에 뜻이 없고 산수와 학문에만 연찬(硏鑽)하였다. 通訓大夫 軍資監에 증직되었다.

황승량(黃承良) : 무과에 급제하고 절충장군 무산도호부사, 무산진병마사, 첨절제사를 역임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황 호(黃 戽)(1604~?) 호는 漫浪, 大小 兩科試에 급제하고 承政院 注書로 출사 후 重試에서도 급제하였다 十州伯冬至使로 淸朝에서 오다 서거하였다.

황 준(黃 晙)(1684~?) 문과에 등과하여 품계가 정헌대부에 이르고 공조(工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황한상(黃漢相)(1728~1819) 자(字)는 계포(季甫), 호(號) 동고(東皐), 故鄕 晋州 大坪 新豊里에서 河東 辰橋 梨谷(梨洞)으로 移住 定着하였어도 진주 신풍의 회와공(晦窩公) 이하 先祖의 先塋과 宗中을 至誠으로 管理하고 宗孫으로써 責任과 의무를 다해 宗家의 기틀이 흔들리지 않게 했다.

또한 後孫들에게 祖上에 대한 崇祖睦宗의 精神과 先塋 및 종중관리에 대한 訓育을 철처히 하여 家訓傳承을 후손에게 유교(遺敎)하였다. 공의 品性이 高邁하고 學問이 넓고 깊어 세인(世人)의 훈교(訓敎)와 존경(尊敬)을 받았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除授)받았다.

91歲의 長壽하는 한편 이곳에 새로운 世居地를 마련하여 他姓인 姜씨 李씨 등을 迎入하여 새로운 洞里을 育成. 相扶相助하며 더불어 사는 希望의 터전을 發展시케 他人들을 成功出世케한 異色적인 梨谷 마을로 稱頌과 後談이 넘치며 先祖의 陰德이 天皇山의 精氣를 이어받아 子孫萬代에 길이빛날 곳이다. 季氏 황한기(黃漢起) 東皐公 通政大夫 知義禁府事를 除授받아 同行 세거지개척(世居地開拓) 함

황상언(黃尙彦)(1769~?) : 호는 죽오. 품계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황세후(黃世垕) : 字는 세경이고, 가선대부 지중추부사 역임했다.

황사영(黃嗣永)(1775~1801) : 16세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왕의 칭찬과 하사금을 받았다. 公은 丁若鏞의 형 若鉉의 사위다. 처가의 인도로 天主敎徒가 되어 알랙산델 라는 敎名과 영세를 받은 후 辛酉迫害事件이 일어나자 제천군 論山 토굴에 숨어 朝廷의 天主敎 迫害 사항을 萬六千字에 달하는 白書에 기록하여 北京에 주제한 主敎 湯士선에게 전달하려다가 사전 탄로되어 순교하였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公을 聖人으로 추대하기 위하여 로마교황청에 신청중이다.

황 수(黃 수)(1587~) : 字는 행원 宣祖 20년 1587년생 柑製試에 장원급제하고 통정대부 여주목사 광주병마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吏曹) 참판(參判)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세자(世子) 좌빈객(左賓客)에 증직(贈職)되었다.

황 순(黃 恂) : 智略과 武藝가 출중하여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에게 발탁되어 영남의 수병을 이끌고 고성과 강진전투 등 6년간을 구국일념으로 심혈을 다하였다. 특히 노량전투에서 적을 대파하고 남해경역에서 적을 追擊 섬멸하다가 순국하였다.

황사겸(黃士謙)(1527년~?) :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으로 태학관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에 제수(除授)되어 후세에게 禮儀道德을 訓育하여 많은 人才를 배출한 바 있어 世人의 추앙을 받고 있다.

황덕호(黃德浩)(1819~?) : 자는 大汝이고 통훈대부 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황후간(黃後幹)(1700~?) : 字는 爾直 號는 이봉 天資가 粹美하시와 일찍 家訓을 傳承하시니 性理學硏究에 專力하시었다 密菴 李載와 제산 金聖鐸에 사사하고 經學의 要旨와 秘訣을 習得하시었다.

황덕수(黃德守)(1787~?) : 字는 潤汝, 號는 龜步, 幼時節 才質이 出象하여 漢學文을 通達하고 후학 양성교육에 지대한 공로자, 周易에 能하여 도술도 하였고 山淸郡志에 기록이 있다.

근대인물(近代人物)

황예식(黃禮植)(1850~1924) : 字 雲五, 號 新溪, 少年期에 早失父母하고 어려운 家庭形便에 克苦 勤勉 誠實하고 儉素하며 晝耕夜讀하여 巨財를 成産, 性品이 仁慈하시어 兄弟間에 友愛있고 睦族和合의 精神을 培養, 부모의 유언에 따라 선향인 신풍으로 형제와 같이 이거하여 집과 전토를 주어 살게 하고, 寺谷寺址에 長兄 仁植 號 新樵公의 學問을 講究하시는 修學堂 兼 원근수재들의 訓學堂을 建立하여 倫理道德을 授講하는데 일조를 하셨디..

황종연(黃鍾淵) (1870~?) : 字는 進華 號는 伊山, 어려서부터 재질이 출중하여 15세에 四書三經과 諸史를 通讀하였다. 二十세에 이르러 聖書의 眞理探究와 修身齊家의 道를 실천하는데 역점을 두고 精舍를 짓고 道學을 講論하면서 즐기니 遠近各處에서 배우러 오는 者가 많아서 學舍에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會輔하는 계를 만들어 講義할 장소를 확장하였다. 會輔의 뜻은 以文會友의 會자와 以友輔의 輔자를 따서 지은 명칭이다. 父母에 孝하고 兄弟間에 敦睦하는 그 절차와 법도가 隣近에 師表가 되었다. 著書에 伊山集五卷이 있다.

황종화(黃鍾和)(1879~?) : 字는 泰潤, 號 夢溪, 獨立有功者. 1910년 韓日合邦이란 國恥條約이 締結되자 上海에 건너가 臨時政府要員으로 活躍하시고 己未年 運動이 勃發되자 國內에 密入하여 獨立運動指導와 軍資金募集에 活動하다가 日本官憲에 逮捕되어 서울 西大門刑務所에서 8年間 獄苦를 치르고, 出監 後에도 日本官憲의 甚한 監視로 出國치 못하고 國內에서 民族運動指導에 힘쓰다가 八一五 解放後 政府樹立에 對備하여 硏究會 組織에 活力하다.

황병서(黃炳瑞)(1883~?) 字는 서윤 통훈대부 승정원 우비서승을 역임하였다.

황용민(黃容敏)(1878~?) : 字 聖若, 號 晩農. 幼年期 聰明令德하여 每事가 篤實 學問에 힘써 遠近의 名望있는 선비를 초청하여 숙식을 제공하고 成山 水亭臺인 三高臺 七樹亭에서 讀書修身으로 文章을 競走에 恒常 首長이 되셨고 孝行學問 忠節이 卓越하여 德望이 높았다. 1914年 江華에서 甲寅譜를 續刊한 때 恭靖公派의 많은 文獻을 提示하고 수단을 持參 四世 君碩 珍의 兄弟를 마로 續刊하는데 많은 功을 寄與하였다.

晦窩公派 宗山은 原來 洞有林이었으나 應淳 鍾奭 錫軫 鍾淵 錫昶 等 門中 元老와 鍾和公이 會合하여 宗中 資産으로 만드는데 공이 켰다.

황병식(黃柄植)(1890~?) : 字는 贊永, 號는 菊圃. 幼時節 才質이 出衆하여 15, 6歲에 四書三經을 通讀하시고 20歲에 活人方便으로 의학서를 정독하여 한의시험에 합격하여 명의로서 고향 진주시 대평면 신풍리에 活躍하셨다. 儒學들과 交友하셨으며 後孫들의 훈도지도에 功이 至大함.

황순규(黃淳圭)(1896 ~1957) : 구국지사 改諱는 潤祚 字는 致敬 號는 南溪. 獨立有功者 黙波 黃鎭生 獨立建國表章 授與의 아버지다. 天性이 剛直하여 不義不取하였으며 지조가 굳세어 세리에 동심치 아니하셨고 文章道學과 言行忠直은 爲鄕道之師表가 되었으며 獨立有功者 夢溪 黃鍾和가 上海臨時政府 要員으로 國內에 密入하여 獨立軍資金을 募集하는데 그 많은 田畓山과 住宅을 모두 다 賣買하여 獻納하였다. 天性이 심히 高傑하여 名聲이 높이 나니 節槪도 물같이 맑고 화살같이 곧았도다. 公의 高貴한 넋이 獨立의 밑거름이 되어 하늘이 無心치 아니하였으니 三十六年의 酷毒한 倭政은 끝나고 光復의 기쁨 맞이하였다. 鄕里에서 널리 推尊을 받으셨다.

황온순(黃溫順)(1901~2004) : 한국보육원원장, 휘경여중고재단이사장, 한국총여성협회회장. 원광대 재단이사

황문수(黃文洙)(1902~?) : 字 致章 號 友石. 幼時에 성질이 호활하고 新聞創作에는 非凡한 才質이 있었다. 일찍 벗과 더불어 國內外의 명승지를 두루 다니면서 到處에 必有명구를 남겼다. 日本 韓醫師試驗에 合格 醫學에도 조예가 있어 활인처방에 적지 않은 경륜을 가졌다. 著書로서 千字文 單方實鑑文稿 等 三大著書가 있다.

황병석(黃柄石)(1903~?) : 字 贊九 號 東塢 公은 天性이 寡黙 謙虛하고 淸廉潔白하여 外柔內剛하고 공정무사하며 才質이 총명하여 一覽記하는 비범하고 탁월한 송재와 기억력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케하였다. 丁酉 己未 兩次의 昌原(檜山) 黃氏大同譜編纂에 貢獻한 바 功勞가 多大하다.

황순주(黃順柱)(1903~?) : 號는 南田, 광주학생사건으로 투옥, 경남도의회 의장, 의원 중임하였고 사천지역에 병원을 개설하여 평생 서민의 건강 관리를 위해 봉사하였으며 지역민의 환심을 사 아들 황성균 대까지 음덕이 미쳐 國會議員에 재선하는 등 황씨문중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황윤호(黃潤鎬) : 진주 진양 출신 초대 제헌의원(制憲議員) 국회의원

황남팔(黃南八)(1906~1986) : 號 江石 산청 사천 하동 김해 군수, 慶南道警局長 晉陽郡에서 三代五代 國會議員活躍, 국회농림분과위원장, 한국황씨중앙종친회 창설, 황씨중앙종친회 3․4대 회장, 회장 재임 시 黃氏名賢錄을 발간함. 韓國 黃氏 발전에 지대한 功勞가 있음. 창원황씨 대종회(세덕회)1-5대 회장

황산덕(黃山德) : 황해도(黃海道) 평양출신 서울대 법대교수, 문교부장관(文敎部長官),

법무부장관(法務部長官), 국회의원(國會議員)

황창주(黃昌柱) : 司法高試, 지검장(地檢長), 광주고검장(光州高檢長), 7, 8대(代) 국회의원(國會議員),

黃氏 中央宗親會 會長, 변호사(辯護士)

황한수(黃漢洙) : (주)세광기업(世光企業) 會長,

국회의원(國會議員),

6-9대 창원(昌原) 황씨(黃氏)대종회 (회산)세덕회(檜山世德會) 회장(會長)

황철중(黃哲重) : 지방법원 조정위원, 한영기업대표이사, 대한증권주식회사 대표이사,

황진생(黃鎭生)(1914~) : 號는 黙波. 독입유공자 晉州高等學校 在學 中 一九二九年 十一月 三日 全南 光州에서 光州高普生과 일본 中學生間에 衝突事件이 일어나자 光州高普生을 지지 성원하는 運動이 全國的으로 파급되어 마침내 三一運動 後 가장 치열한 항일민족운동으로 發展하였다. 韓日同志會를 주도하면서 民族의 獨立思想을 고취하고 항일 示威運動을 전개코자 많은 同志를 규합, 社會課學書籍을 輪讀하 는 한편 그 책임자가 되어 조직확대를 위해 活動을 하다가 日本警察에 逮捕되었다. 그는 長期間 예심조사를 거쳐 치안유치법 위반이란 罪目으로 一年餘의 刑을 宣告받고 진주형무소에 獄苦를 치렀다.

황성모(黃性模) : 철학박사, 서울대 철학과 교수 역임

황철신(黃哲信) : 육군준장으로 예편, 軍法務官 辯護士

황영규(黃永圭)(1918~?) : 號는 牛步. 경무관(警務官) 부산 경남 경찰청 課長, 警察署長. 경찰학교 교장. 부산시 유도협회 회장. 부산시 교통안전협회 회장. 황씨부산종친회회장 20년간 역임

황수희(黃壽熙)(1911~?) : 字는 敬甫. 漢文 修學, 世界黃氏宗親會 顧問, 한국황씨종친회 고문. 巨財喜捨종친회 발전과 본대종회 발전을 위해 공헌함

황상우(黃相禹)(1927~ ) : 號는 喜亭, 육군대령 군무관리관 금성화랑, 은성화랑 무공훈장 수여.

황철정(黃哲貞) : 총경, 경찰서장, 서울시경 과장

황정용(黃正容)(1930~ ) : 字는 昌夫, 조산주조협회장, 죽산서원 종무위원장, 宗中資源을 調達하여 竹山祠宇를 補修함

황후락(黃後樂)(1930~ ):字 舜達 號 大谷 鐵道廳 38年 勤續 地方 서울 驛長 本廳 司令室長 모범공무원상 수상. 宗中 司正公派 慶北 榮州市 龜巖先生(구암선생)사당 敬德祠 祠堂重建 推進委員會 會長 파보추진위원장(派譜推進委員長) 私財數千희사

황진덕(黃鎭德)(1933~ ) : 號는 竹田, 초등학교교장 국민훈장 동백장 수여

황상신(黃相信)(1933~1984) : 대한수출입은행장 석탑산업훈장,

황인수(黃仁秀) : 육군중장, 국방부차관, 중국 북경대학 교수

황은환(黃銀煥) : 사법고시(司法高試),

고등검찰관(高等檢察官), 국회의원(國會議員),

한국 황씨 중앙종친회 회장(韓國 黃氏 中央宗親會 會長), 변호사(辯護士)

현대(現代)의 인물(人物)

황영시(黃永時): 육군대장, 육군참모총장, 감사원(監査院) 원장(院長), 창원황씨 대종회 고문 문중의 기여도가 매우큼 (政丞級)

황대영(黃大永)(1924~ ) : 4개 지역 군수, 통영시장, 중소기업 경남지부장, 진주시문화원장 녹조근정훈장, 세덕사 회장, 대종회 고문

황상영(黃相瀯)(1932~ ) : 號는 海眞, 국가유공자. 하와이주립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고려냉동해운(주) 대표이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장로, 대신선박 (주) 대표이사, 한국해군동지회 회장, 황씨부산종친회 회장, 대종회 고문, 부신종친회 회관건립과 창원황씨 시조 제단 등을 중건설단 하는데 수억원의 성금을 헌성하여 중수계획에 있는 모든 사당의 복원에 관심을 갖고 협조하고 있음. 화랑 및 충무금성무공훈장수여. 저서 「영혼한 眞理를 찾아서」등 다수 있음

황우석(黃禹錫)(1953~ ) : 수의학박사, 서울대 석좌교수, 세계최초로 난자를 이용 배아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해 난치병치료에 획기적인 길을 연 공로로 서울대 석좌교수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 국가원수에 준하는 신변경호를 제공하고 있으며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황씨대종회 고문, 홍조근정훈장수상. 세계적인 인물로 장래가 총망될뿐 아니라 만인이 부러워 하는 黃氏 문중의 보배중의 보배임

황택주(黃澤周) : 총경 경찰서장, 고속터미날 운영총괄 상무. 평주공, 장무공파 종회장 대종회 고문

황진오(黃鎭五)(1931~ ) : 字는 善夫 號는 松庵. 지방공무원으로 일생동안 타에 모범이 되어 지역사회에 봉사함. 丁酉, 己未 大同譜 編纂에 기여함. 竹山祠, 道隱祠, 世德祠 祭享委員長 역임. 창원(회산)황씨 대종회 부회장. 죽산사 종무위원장, 부산시 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 황씨문중 기록 및 문안작성 편집 추진 위원장.[한국성씨 총연합회 기록준비위원장]

황병위(黃兵衛) : 일본국 동경 크레크외국어고등전수학교, 및 크레거 International School 동경국제문화학원 이시장, 일본컴퓨터디자인전문학교 이사장. 비즈니스 학원 이사장, 오차노미스고등학교 이사장. 大宗會 顧問 본 대종회 발전과 황씨 문중의 장래를 위하여 헌성 계획중에 있으며 국제적 사업가로써 기대하는바 크며 중국대륙에서 기업건설 본문중의 큰별

황정대(黃貞大)(1927~ ) : 경남화학면허시험관 및 교수, 대종회 고문 회와공 문중 및 본 대종회 발전에 공헌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외 다수

황상섭(黃相涉)(1933~ ) : 국회의원 보좌관, 진주향교 상임장의, 민주당중앙위원, 창원황씨 회와공파 종회장, 창원(회산)황씨대종회 부회장. 본 종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며 문중의 중량급 인물

황팔주(黃八周)(1927~ ) : 서기관 재무부세무공무원 교육원 교수. 창원(회산)황씨 장무공파종회 회장 사당 중건, 위토 환수, 재실건립, 파보창간, 유적지 성역화사업을 통해 파종회 발전에 기여

황종례(黃鍾禮) : 1945년 이화여대. 대학원.졸업 (1962-1980) 18년간 이화여대 교수. (1980-1993) 국민대 교수. 대한산업미술가협회 회장. 고문. 한국현대도예가협회 회장. 고문. 한국도자기협회 회장. 고문.도자기 개인전 20여회 개최. 황종례 도예연구소 (黃鍾禮 陶藝硏所) 운영 90 문화예술상. 98 문화예술상 수상. 본대종회 고문. 문중발전에 기여

황창익(黃彰益) : 충북은행장, 은행감독원장, (주) 우송터치시스탬 대표이사, 황씨중앙종친회 부회장, 대종회 고문 종친회 발전에 공로가 지대함

황용탁(黃容卓)(1934~ ) : 字는 必中, 號는 象步. 황씨부산창원(회산)종친회 회장. 대종회 고문 황씨(회산)대종회 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큼으로 칭송이 자자함

황용언(黃龍彦)(1938~ ) : 창원황씨부산종친회 회장, 부산진시장번영회회장, 부산RC회장. 대종회 고문 특히 부산 종친회 발전에 기여한공로가 지대하며 죽산사 사당 중건에 많은 성금을 지원을 하셌음

황문규(黃文圭)(1935~ ) : 號는 西湖. 경무관, 경찰서장 부산경찰청 과장, 세덕사 회장, 황씨대종회 고문

황성균(黃性均)(1955~ ) : 서울대학교 의학박사, 공군 의무대대장. 진주 한일병원 원장, 지방공사 진주의료원 원장, 진주시 의사회 회장, 제13, 15대 국회의원, 의료보험공단 이사장, 의료법인순영재단 이사장 제10-14대 창원(회산)황씨 대종회 회장, 사천 孝貞公 諱 珍 사당을 수억원을 들여 중건 건립하였다. 본 대종회 발전을 위해 성심 성의껐 노력 했으며 전공이 의사인 관계로 인하여 자성 자비의 성정으로 약자의 힘이 되어 야중의 빛과 같은 큰 인생관을 창조 하였음 새마을 훈장 근면장 및 10여개의 훈.표상이 있음

황우려(黃祐呂)(1947~ ) : 사법고시, 法學博士, 지방법원 부장판사, 청주지법제천지원장, 감사원 감사위원 15, 16, 17대 國會委員, 國會敎育分科委員長, 황씨 중앙 종친회 부회장, 黃氏大宗會 副會長 본 창원(황씨)대종회 발전에 공로가 지대하며 성성장구 하여 4.5.6.선등 한국의 정치사에 큰 기둥으로 기대가 큼

황우필(黃祐弼): 재경부 사무관. 창원황씨평주공파종회회장. 아파트관리사협회장. 아파트신문사회장, 대종회 부회장 평주공 사당 건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종사(문중)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함

황산성(黃山城)(1944~ ) : 사법시험, 판사, 국회의원, 환경부장관, 변호사. 대종회부회장. 여성으로써 본종친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함

황필생(黃熚生): 이사관. 경남백미연구회회장, 경남농촌진흥원장, 황씨진주종친회회장. 창원(회산)황씨대종회 부회장

황진욱(黃珍旭) : 천안대학교 총장, 이사관(국회사무처) 대종회 부회장. 본종회 발전을 위하여 회장단과 함계 씨족이 있는 곳을 찿아 전국 방방곳곳을 순회하며 뿌리 알리기등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으며 특히 문중의 신혼부부 주례 행사는 전적으로 맡아주고있으며 공로가 인정되어 만인의 龜鑑이됨

황우익(黃祐翊)(1935~ ) : 이학박사 고려대 의과대학교수, 캘리포니아 대학교 초빙교수 고대생화학주임교수역임 기간 중 인삼에 대한 연구결과를 미국 브라운 대학에서 고려인삼에 항암작용이 있다는 것을 규명하고 1978년 세계인삼학술대회에서 최초로 발표한 바 있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본대종회 부회장.

황명순(黃明順) : 황씨중앙종친회 부회장, 대종회 부회장. 황씨여성회 회장 부모의 유업을 전승코저 최선을 다하고 본종회 발전과 선조 섬기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음

황영문(黃煐文)(1934~ ) : 공학박사 창원(회산)황씨대종회 고문. 부산대학교 교수, 대한전기학회 회장, 창원(회산)황씨대종회 부회장 국민훈장 동백장

황 일(黃 溢) : 단국대 이학박사, 건국대 교수, 학장, 대학원장. 녹조근장훈장, 저서 「미분적분과 해서기하학」본종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큼

황용호(黃龍浩) (1936~ ) : 경영학 박사, 동국대학교 교수 학장, 미아리조나주립대, 워싱톤대, 온리곤주, 남주립대, 교환 및 객원교수, 창원(회산)황씨대종회 고문. 본종회 발전에 기여한 바 큼.

황길환(黃吉煥)(1948~ ) : 황씨장무공파종회 부회장, 경희대학교 겸임교수. 대종회 부회장. 본종회 발전에 기여한 봐큼

황동주(黃東柱)(1933~ ) : 字 信夫. 경남도교육위원회 중등장학관, 중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 교장. 대종회 부회장. 죽산사 사당 발전을 위하여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며 후손들의 교육이 탁월하여 장래가 총망되며 문중의 영광으로 기대가 큼

황병한(黃炳漢)(1934~ ) : 공무원교육원 교수 창원황씨대종회부회장 문중에 공헌한바 크며 장래가 총망됨

황기인(黃起寅) : 공학박사, 우성건설주식회사 총본부장, 秋京會 會長. 건설유공훈장 수훈. 우정엔지니어링감리단장 및 감사. 대종회 부회장 문중의 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크며 앞으로 장래가 총망함

황민환(黃旻煥)(1944~ ) : 字는 致仁, 공학박사. 감정사 감정평가사, 토지감정평가사협회 감사. 대일에셋감정평가법인 이사겸 고문, 민익, 문민, 충렬공파종회 회장 본 대종회의 발전에 헌신봉사 했으며 부여 종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인정됨.

황마동(黃馬同) : 부산종친회 총무부회장, 창원황씨 대종회부회장 본 종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적이 있으며 각지방 문중행사에 참여하여 훈육에 모범이 됨.

황상홍(黃相洪)(1940~ ) : 영남방직(주) 감사. 대종회 부회장

황창규(黃昌圭)(1944~ ) : 죽산사 총무, 함안공업사 대표이사. 대종회 부회장. 창원황씨 공희공 대종손.

황성진(黃性珍) : 사법시험, 군법무관 수원, 부산, 서울지검 차장검사, 변호사. 대종회 부회장

황봉규(黃奉圭)(1944~ ) : 창원황씨판윤공파종회장, 제일모직노사협의회장. 社內 성화섬유 대표이사. 대종회 부회장. 죽산사 총무. 본종회 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인정됨.

황인호(黃寅浩) : 교육학박사 고려대 교수, 대종회 부회장.

황정렬(黃正烈)(1954~ ) : 의학박사. 고려대 의대 외래교수, 황비뇨기과 원장. 대종회 부회장

황정부(黃政夫)(1944~ ) : 대유증권(주) 대표, 강동상사(주) 회장. (주)세계정부 대표이사. 대종회 부회장.

본 대종회 발전에 기여한바 큼

황영수(黃永洙) : 동국대학교 사무처장, 대종회 부회장 죽산사 사당 중건등 본대종회 발전에 헌성금을 희사하는 성의를 타 종인에 모범이 됨.

황인태(黃仁泰)(1957~ ) : 뉴욕주립대학 경영학박사, 중앙대학교경영대학 부학장, 회계지도심사위원 김융감독위원회 전문심사위원,

황교안(黃敎安)(1957~ ) : 사시 부장검사, 법무연수원 교수, 부산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 고검검사. 창원(회산)황씨대종회 부회장 종인들의 어려운 여건을 감안 법률적 지도에 헌신봉사 기여함 장래가 총망

황의호(黃義浩) : 서기관, 농림부 과장, 백아실험실장

황명호(黃明浩) : 경남은행 이사, 공인토지평가 경영진단사 본대종회 부회장 숙부 황진오씨의 도움으로 종사연구 발전에 기여한바 큼

황훈성(黃焄成)(1961~ ) : 동방그룹(주) 영업부 부장, 모세해운주식회사 대표이사, 본대종회 부회장 父親

황상영 회장의 뜻에 따라 종사에 온갖 정성으로헌신 봉사하고있음

황상욱(黃相郁) : 의학박사, 병원 원장.

황기철(黃基哲) : 육군대령, 학교법인 중경재단 근무

황병현(黃炳賢) : 육군대령

황재영(黃在永) : 부산동아대학총동문회부회장, BBC해운대지구 회장

황세진(黃世鎭)(1931~ ) : 오크라호마 주립경찰대학교수, 동주한인협회 회장. 전임 황남팔 회장님 장자로써 미국 사회에서 모범을 보이며 한국 황씨 종친회 와 본종회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만방에 알리는 체육학 박사(교수)

황성일(黃盛一) : 경무관, 경찰청,서울 각지역 서장 본청과장 본 종회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로로 높이 평가 되고 있으며 장래가 총망됨.

황인택(黃仁澤)(1938~ ) : 경남교육위원회 초등장학관 초등학교 교장

황하수(黃河水)(1936~ : 한국전력(주) 전무, 은탑산업훈장, 전우실업(주) 사장. 본 대종회 발전에 공이큼

황병화(黃炳和) : 이사관, 농산물검사소장. 본 대종회 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인정됨

황상민(黃相珉)(1942~ ) : LA유니버스(株) 회장

황태규(黃泰圭) : 인제대학교 교수, 백병원 원장

황용경(黃容瓊)(1958~ ) : 사법고시,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 본원 수석부장판사. 황동주 부회장의 장자로서 대종회 발전에 매우큰 업적과 공로가 높이 평가되며 장래가 총망되며 문중의 기대가 큼

황용우(黃容宇)(1956~ ) : 기능고시 서기관, 경남도 과장

황진화(黃鎭華) : 두산그룹계열사 사장 본 대종회 발전에 공로가 지대하며 장래가 총망 됨

황군주(黃君柱)(1950~ ) : 부산대학교 교수, 한국광고협회 전무

황숭규(黃崇圭)(1955~ ) : 의학박사. 의원 원장,

황명헌(黃明憲)(1941~ ) : 초등학교 교장

황병준(黃炳畯)(1944~ ) : 이사관 조달청 국장.

황형규(黃炯奎)(1942~ ) : 육군중령,

황선희(黃善姬)(1959~ ) : 문학박사,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산 종친회 회장 장녀로써 부모의 공적을 따라 본 대종회의 발전에 공로가 지대함

황성규(黃聖圭) : 초등학교 교장

황민철(黃玟哲) : 사법고시 변호사

황환민(黃煥珉) : 司法고시 변호사

황성택(黃聖宅)(1958~ ) : 의학박사. 울산 호계외과의원 원장,

황광혁,용혁(黃光赫,容赫)(1950~ ) : 육군대령, 저서 「통일후 한국의 예비군 제도」본 대종회 부회장. 대종회 발전에 공로가 지대함

황인하(黃寅河)(1940~ ) : 이사관 국회사무처 과장, 대한속기협회이사장 홍조근정훈장

황인규(黃仁奎)(1972~ ) : 의학박사 공군 의무관

황진희(黃鎭喜)(1952~ ) : KBS방송국 부장

황대규(黃大圭) : 건축학박사, LG주식회사 건축연구실장

황의용(黃義勇)(1944~ ) : 시흥중, 산본공업고등학교 교장. 창원황씨대종회 부회장

황제돈(黃帝敦)(1958~ ) (주) 에스코 컨설턴트 전무이사.

황두현(黃斗鉉) : 성화개발 대표이사

황진석(黃鎭鍚)(1943.4.20.生) : 字는 晋星 號는 東極, 國營業體 重役, 理事官 待遇, 황씨중앙종친회 이사,

宗事연구위원, 昌原(檜山)黃氏大宗會 총무부회장. 동극산업 건설페인트(株) 代表理事, 서울시 敎育委員, 民主同志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