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성산이씨시조(星山李氏),이능일(李能一),성산이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3-06 17:44 수정일 : 2018-08-23 10:15

성산이씨의 연원(星山李氏의 淵源)

성산이씨의 시조 휘 능일(能一)은 나말(羅末) 여초(麗初)에 지용(智勇)을 겸전한 장수로서 성산(星山=現 星州) 일대를 통치해온 지방 호족이다.

고려태조 8년(925) 겨울에 왕이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조물군(曹勿郡: 현 경북 서북부지방)에 이르러 시조공을 본부장군(本部將軍)으로 삼으니 시조공은 최언(崔彥)과 더불어 민병(民兵) 600여명을 거느리고 견훤을 토벌하는 등 12년 동안 왕건을 도와 후삼국(後三國)을 수훈(殊勳)을 세웠다.

태조가 천수(天授) 19년(936)에 삼한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공신들에게 대상(大賞)을 내릴 때 우리 시조공의 좌명(佐命)의 공을 높이 찬양하여 초휘(初諱) 능(能) 자에 삼한통일의 일(一)자를 가하여 능일(能一)로 사명하고 벼슬을 정일품인 개국벽상좌명공신(開國擘上左命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사공(司空)으로 높이고 왕녀 정순대장궁주(淨順大長宮主)와 짝지어 부마(駙馬)로 삼았다.

태조 23년(940)에 개경 신흥사(新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짓고 당내 동서 벽상에 삼한통일의 좌명공신(佐命功臣)들의 화상(畵像)을 그릴 때 시조공의 화상도 함께 그려졌으며 전국의 주군제도(州郡制度)를 개혁할 때 시조공의 공훈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공의 소거지인 성산, 신안, 적산, 수동, 계자 등 오현(五縣)을 통합하여 경산부(京山府)로 승역하고 경산부의 으뜸인 성산군을 봉지(封地)로 삼아 성산군으로 봉하였으니 이로 인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성산(星山)으로 하였다.

이후 천여 년 동안 많은 자손이 시조공의 위훈(偉勳) 여렬(餘烈)을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홍유(鴻儒) 거작(巨爵)과 효행(孝行) 충절(忠節)이 세세(世世) 접종(接踵)하여 국가 사회에 이바지하고 크게 문호를 빛냈다.

조선조 숙종 6년(1680)에 성주목사 신학(申㶅)의 꿈에 신령스런 위장부(偉丈夫)가 나타나 '이곳 사창(司倉)의 자리는 나의 소거지로 내가 늘 마시던 음정(飮井)이 있는데 허다한 우마(牛馬)의 잡답으로 더러운 웅덩이가 되었으니 성주(城主)는 부디 깨끗하게 해달라' 고 하였다. 신목사는 꿈에서 깨어나 이상하게 생각하여 옛 관원에 물어 영(令)으로 우물을 준설한 후 돌로서 우물벽을 쌓고 정각(井閣)을 세워 이공신정(李公神井)이라 현판을 걸었는데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지금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성주군청 서남쪽에 위치한 약 2,000평의 대지에는 시조공과 그 오대손 고려 대상경(大常卿) 휘 견수(堅守)를 봉향하고 있는 경원사(景源祠)를 비롯하여 성산재, 저존당, 유비허, 통승루 등이 있으며 특히 이공신정은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성산이씨의 인구 분포는 성주를 비롯하여 고령, 영천, 달성, 김천, 의성, 칠곡, 경주, 상주, 청도, 영일, 합천, 창녕 등지에 취락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대구, 부산, 서울 등 대도시에 많이 진출하여 활약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산이씨는 전국에 113,0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성산이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이능일(李能一)   고려시대 1世 시조(始祖) 고려벽상좌명공신(高麗擘上左命功臣) 삼중대광사공(三重大匡司空), 성산군(星山君)
이일권(李逸卷) 고려시대 2世 좌윤장군(佐尹將軍 : 고려 삼사의 종3품 벼슬)을 역임하였다.
이광연(李光演) 고려시대 3世 제릉서(諸陵署 : 고려 때 왕릉을 돌보는 관청)의 영(令-종5품직)을 역임하였다. 
이정신(李正臣) 고려시대 4世 태자태보(太子太保 : 고려 때 종1품 벼슬)를 역임하였다. 
이견수(李堅守) 고려시대 5世 국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경(大卿)에 이르렀다. 
이광(李 匡) 고려시대 6世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봉어동정(奉御同正)에 이르렀다.
이직(李 直) 고려시대 6世 의종때에 대경(大卿)에 이르렀으며, 의종 24년(1170) 정중부의 난(亂)으로 화(禍)를 입었다. 
이입중(李立中) 고려시대 7世 검교소감(檢校少監)을 역임하였다. 
이대립(李大立) 고려시대 7世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역임하였다. 
이우당(李宇唐) 고려시대 9世 봉익대부 정당문학찬성사(奉翊大夫 政堂文學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이보(李 ?) 고려시대 10世 주부동정(主簿同正)을 역임하였다. 
이영(李 英) 고려시대 10世 원종 때에 수공녹훈(樹功錄勳)을 받아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다. 
이익손(李益孫) 고려시대 11世 봉익대부 전공판서(奉翊大夫 典工判書)를 역임하였다. 
이배(李 培 ) 고려시대 12世 봉익대부 예의판서 상호군(奉翊大夫 禮義判書上戶軍)을 역임하였다.
이문광(李文廣) 고려시대 13世 봉상대부(奉常大夫)에 피봉되고, 평양소윤(平壤少尹)이 되었다. 
이문성(李文成) 고려시대 13世 봉익대부(奉翊大夫)에 피봉되고, 한성보익공신(翰誠輔翊功臣)이 되었다. 
이여충(李汝忠) 고려시대 14世 우왕 3년(1377)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인주사(知仁州事)를 역임하였다. 
이여신(李汝信) 고려시대 14世 우왕 때에 지 김산군사(知金山郡事)를 역임하였다. 
이여랑(李汝良) 고려시대 14世 우왕 6년(1380)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무좌랑(禮務佐郞)을 거쳐 우왕 10년(1384)에 사간원 좌정언(司諫院 左正言)이 되고, 그 후 강원도 안렴부사(按廉副使)가 되었으나, 고려말 나라의 패망을 한탄하여 야은 길선생(冶隱吉先生)과 함께 낙향하여 대조동(大鳥洞)에 은거하였다.
이희(李 禧) 고려시대 14世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조선시대 인물

이진손(李眞孫) 조선시대 14世 부총관(副總官)을 역임하였다. 
이사징(李士澄) 1418~1454 조선시대15世 호가 송오(松塢)이고,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을 역임하였으며, 고령입향조가 되었다. 
이사청(李士靑) 조선시대 15世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이우(李 友) 조선시대 15世 세종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였고, 세종 27년(1445)에 보공장군(保功將軍)으로 경기좌도 수군첨절제사(京畿左道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피봉되었다.
이시(李 時) 조선시대 15世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역임하였으며, 안동도호부사에 증직되었다. 
이중화(李重華) 조선시대 15世 호가 기국(杞菊)이고, 한성판관(漢城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사정(李士貞) 조선시대 15世 수임교위(修任校尉)를 역임하였다. 
이극강(李克剛) 조선시대 16世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이맹산(李孟山) 조선시대 16世 호가 지신정(志新亭)이고, 학문에 능통하였다. 
이민재(李敏材) 조선시대 16世 통정대부 양산군수(通政大夫 梁山郡守)를 역임하였다. 
이인주(李仁周) 조선시대 16世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이유구(李悠久) 조선시대 16世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이효순(李孝純) 조선시대 16世 사직(司直)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참판 동지의금부사(吏曹參判 同知義禁府事)를 증직받았다. 
이유전(李由傳) 조선시대 16世 호가 모정(茅亭)이고, 수임교위(修任校尉)를 역임하였다. 
이석보(李錫保) 조선시대 17世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역임하였다. 
이벽(李 璧) 조선시대 17世 진사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철권(李鐵拳) 조선시대 17世 창신교위(彰信校尉) 훈련참군(訓練參軍)을 역임하였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이양(李 陽) 조선시대 16世 자가 회옹(晦翁)이고, 성종 20년(1489) 문과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훈도(訓導)로서 여생을 보냈다. 
이인령(李麟齡) 조선시대 17世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를 역임하였고,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다. 
이의지(李宜智) 조선시대 17世 사헌부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이손형(李遜亨) 조선시대 17世 음사(蔭仕)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이의인(李宜仁) 조선시대 17世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이시형(李始亨) 조선시대 17世 선무랑(宣務郞) 역임하였다.
이의용(李宜勇) 조선시대 17世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하였다. 
이규(李 珪) 조선시대 18世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증직되고 합천의 입향조이다.
이겸형(李謙亨) 조선시대 17世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훈도로서 여생을 보냈다.
이승형(李升亨) 조선시대 17世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진(李 珍) 조선시대 18世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이복형(李復亨) 조선시대 17世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방(李 芳) 조선시대 18世 경학으로서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제수받았으며, 영천의 입향조가 되었다. 
이반(李 斑) 조선시대 18世 북청판관(北靑判官)을 역임하였다. 
이세인(李世仁) 1452~1516 18世 호가 연담(蓮潭)이고, 조선 성종 17년 (1486)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검교(檢校), 지평(持平)을 역임하였으며, 연산군 4년(1498)에 장령(掌令)이 되고, 연산군 6년(1500)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이 되었으나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하다가 나주(羅州)에 유배(流配)되었다. 연산군 10년(1504)에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다시 금산에 유배되었으며, 후에 사간원 전적(典籍),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중종(中宗) 6년(1510)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어 호조참의(戶曹參議), 황해도 관찰사(觀察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옹(李 ?) 1462~졸년미상 18世 문과에 급제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 예문관(藝文館), 한림(翰林), 천문관예습관(肄習官=?習官)을 역임하였다. 
이항(李 沆) 1474~1533 19世 호가 낙서헌(洛西軒)이고, 연산군(燕山君) 4년(1498)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종 1년(1506)에 호당(湖堂)에 선발되었다. 중종 14년(1519)까지 이조(吏曹), 예조(禮曹),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이사(貳師)가 되었다. 중종 19년(1524)에 김안로(金安老)의 죄상을 논죄하다가 누명을 쓰고 유배되어 적소(謫所)에서 사사되었다. 후에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신원(伸寃)으로 관작(官爵)이 복구(復舊)되었다.
이언함(李彦涵) 조선시대 19世 예빈시 참봉(禮賓寺 參奉)과 통사랑(通仕郞)을 역임하였다. 
이언침(李彦沈) 조선시대 19世 성종 23년(1492)에 재랑(齋郞)이 되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언기(李彦沂) 조선시대 19世 호가 처야당(處野堂)이고,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영천으로 낙향하여 처야당(處野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수홍(李守弘) 1496~1562 청하·비안(淸河·比安)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성(李 城) 1502~1528 호가 송암(松巖)이고, 조선 중종 19년(1524)에 무과에 급제하여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 강진현감(康津縣監), 이성군수(利城郡守)를 역임하였다. 
이발(李 勃) 생년미상~1567 훈련원 습독관(習讀官)을 거쳐 선무랑(宣務郞)을 역임하였다.
이기(李 琦) 1504~1542 자는 재여(裁汝)이고, 號는 호암(虎巖)이다. 조선 중종때 사마(司馬)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을 역임하였으며, 안동 일직파조이다.
이침(李 沈) 1504~1560 자가 심경(深卿)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요년(李堯年) 1513~졸년미상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이학손(李鶴孫) 조선시대 보공장군 충무위부사과(保功將軍 忠武衛副司果)를 역임하였다. 
이수견(李守堅) 1515~1566 字가 윤중(允中)이고, 용양위 부호군(龍?衛 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순연(李舜年) 1516~졸년미상 보공장군 만호(保功將軍 萬戶)를 역임하였다. 
이수종(李守種) 1518~1597 호가 금옹(琴翁)이고, 음보(蔭補)로 훈련원습독(訓練院習讀)을 역임하였다. 
이희관(李希寬) 조선시대 호는 모헌(慕軒)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이운(李 雲) 1535~졸년미상 자는 여우(汝雨)이고 호는 삼계(三溪)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곽망우당(郭忘憂堂) 휘하에서 두 동생(春亨.需)과 종제(霙) 및 아들 4형제(永源.永淳.永淸.永澤) 및 조카(永淑.永海.永抗.種仁)와 함께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이징(李 澄) 1537~1560 자가 철원(鐵原)이고, 사과(司果)를 역임하였다. 
이정춘(李貞春) 1539~1572 호가 남규(南圭)이고, 명종 13년(1558)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이린(李 ?) 1539~1595 호가 산택당(山澤堂)이고, 역학(易學)에 통달하였으며, 선조(宣祖) 1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낙향하여 산택서당(山澤書堂)을 건립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일(李 馹) 1540~ 훈련원 참군(訓練院 參軍)을 역임하였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추천으로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이득춘(李得春)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김면(金沔)과 더불어 의병창기하고, 전비(戰費)로 수천석의 가산을 헌납하였으며 무계대첩 등에서 공을 세웠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기춘(李起春) 1541~1597 호가 옥산(玉山)이고, 낙강칠현(洛江七賢)의 수위(首位)로서 용사지난(龍蛇之亂)에 참여하였으며, 학문에 능통하였다. 
이춘형(李春亨) 1541~1600 자가 여상(汝常)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아들 永淑외 12從叔姪과 함께 의병에 가담하여 큰 功을 세웠다. 
이성범(李成範) 1541~1607 명종(明宗)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수(李 需) 1543~졸년미상 자가 여진(汝震)이고, 호는 수정(壽亭)이다.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형제가 함께 의병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화(李 ?) 1546~졸년미상 자는 희원(希遠)이고,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다.
이영(李 霙) 1546~1616 호가 운포(雲圃)이고,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12종숙질(從叔侄)과 더불어 창의하여, 곽망우당(郭忘憂堂)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후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추천으로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이성간(李成簡) 1547~1628 자가 경홍(慶弘)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증직되다.
이복용(李伏龍) 1548~1635 자는 경소(景昭)이고, 호는 판포(板浦)이다. 계공랑사재감직장(啓功郞司宰監直長)을 역임하였다.
이동례(李東禮) 1551~1593 호가 근제(謹齊)이고, 벼슬이 사헌부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실기세고(實記世稿)가 전하고 있다. 
이지암(李之巖) 1559~1633 자가 백앙(伯仰)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경(李 瓊) 1559~졸년미상 문장이 뛰어난 학자로서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자감 봉사(軍資監 奉事)에 기용되었다. 
이국빈(李國賓) 1560~1624 호가 국헌(菊軒)이고, 임진왜란 때에 창의하여 권응수(權應銖) 등과 함께 영양성(永陽城) 탈환에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으며, 계공랑(啓功郞), 내자시 직장(內資寺直長)을 역임하였다.
이영숙(李永淑) 1564~1630 자는 도숙(導叔)이고, 호는 우제(尤齊) 또는 송천(松川)이다. 춘형(春亨)의 아들로서 진사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창의하여 공을 세웠으며, 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수의부위(修義副尉),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역임하였다. 
이윤선(李胤先) 1566~1644 자가 선술(善述)이고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노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이성락(李成洛) 1566~1650 자는 사범(士範)이다. 훈련원판관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이영해(李永海) 조선시대 자가 백함(伯涵)이고, 임진왜란때에 곽망우당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를 역임하였다.
이윤선(李胤先) 1566-1645 자가 선술(善述)이다.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참봉(參奉)이 되었으며, 노후(老後)에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이군빈(李君賓) 1568~1640 號가 남포(南浦)이고, 임진왜란 때에 兄인 국빈(國賓, 號-菊軒)을 따라 참전하여 영양성을 탈환하는 데 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봉정대부사재감정(奉正大夫司宰監正)을 제수받았다. 
이용빈(李用賓) 1569~1623 호가 지오(芝塢)이고, 장사랑 정읍훈도(將仕郞井邑訓導)를 역임하였다. 
이윤무(李胤武) 1569~1636 자가 계술(季述)이고, 호가 양봉(陽峯)이다.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문장이 뛰어나고, 우복(愚伏) 정선생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동백(李東白)  조선시대 선조 3년(1570)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선조(宣祖) 25년(1592) 임진왜란 중에 김면(金沔) 진중에서 책모(策謀)로서 활동하였다. 
이동길(李東吉) 조선시대 자는 경원(景元)이다. 별무과(別武科)에 합격하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김면 장군의 호군(護軍)으로 무계대첩 등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와 진위장군(振威將軍)을 역임하였다. 
이수언(李秀彦) 1571~1643 호가 추모헌(追慕軒)이고,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평생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명정(李名丁)  ~1598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하였다. 
이달운(李達運) 1572~1653 자는 도원(道源)이고, 호는 성남(星南) 또는 성은(星隱)이다. 선조(宣祖)조에 등과하여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역임하였다. 
이영항(李永抗) 1573~1606 자가 숙함(叔涵)이다. 임진왜란때에 곽망우당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이연건(李延建) 1573~1612 사복시 첨정(司僕寺 僉正)을 역임하였다. 
이매신(李梅臣) 1573~1635 관직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삼성(李三省) 1574~1626 호가 만송(晩松)이고, 인조 1년(1623)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영산군수(靈山郡守), 하동군수(河東郡守)를 역임하였다. 
이심근(李深根) 1576~1637 관직이 훈련원 봉사(訓練院 奉事)이었는데, 관직에서 퇴임하던 시기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當하여 62세의 나이로 향병(鄕兵)을 인솔하여 적과 싸우다가 인조 15년(1637)에 송파(松坡)에서 순절하였다. 
이현룡(李見龍)  1580~1654 호가 죽포(竹圃)이고,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때에 창의하였으며, 인조 13년(1635) 사마시(司馬試) 문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창의하였고, 그 공으로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이 되었다가 인조 20년(1642)에 군위현감(軍威縣監)이 되었다. 公의 동생인 문룡(文龍,-菊圃), 택룡(澤龍,-梅圃)과 함께 도학과 학문으로 이름을 얻어 관동삼포(館洞三圃)로 불리었다. 
이문룡(李文龍)  1584~1655 호가 국포(菊圃)이고, 정묘 병자호란때 창의하였고, 학문이 능통하여 미산처사(薇山處士)로 불리었다. 
이정현(李廷賢)  1587~1612 자는 원노(元老)이고 호는 월봉(月峯)이다. 광해(光海)조에 문과식년시(文科式年試)에 급제하여 홍문정자(弘文正字)를 지냈다. 약관에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의리(義理)의 학문을 익히고 거경(居敬)에 힘써 사림의 명망이 우뚝한 바 있었으나 26세에 요절하였다. 
이택룡(李澤龍)  1588~1620 호가 매포(梅圃)이고, 광해군 9년(1617)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다. 
이영원(李永源)  조선시대 字는 정숙(淨叔)이고 號는 유은(裕隱)이며 임란에 창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학명(李鶴鳴)  1588~1650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가 되고, 임난 때 창의하였다. 
이염(李 琰)  1593~1649 호가 운당(雲塘)이고, 인조 2년(1624)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정웅(李廷熊)  1595~1662 자는 덕수(德?)이고 호는 동주(東州)이다. 소과에 급제하여 구군훈도(九郡訓導)로서 이름을 얻었으며, 인조 14년(1636)병자호란에서 왕이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을 당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기고 두문불출하였음으로 숭정처사(崇禎處士)로 불리었다.
이사룡(李士龍) 1595~1641 인조 18년(1640) 청(淸)이 조선에 대하여 명나라 침공을 위한 원병을 요청하자 공이 포사(砲士)로 징발되어 금주(錦州)싸움에 참전하여 명나라의 조대수(祖大壽)의 군대와 접전하였을 때 공포(空砲)로 응전하다가 청군에 발각되었다. 그 일로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공은 임진왜란 때에 명으로부터 입은 은덕을 상기시키며 자기행동의 정당성을 역설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에 명나라의 장수인 조대수가 공을 대명충신조선의사(大明忠臣朝鮮義士)로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그 후 인조(仁祖)는 공을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증직하고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충열사(忠烈祠)를 세워 향사토록 하였다. 
이종규(李宗規) 1596~1656 자가 사헌(士憲)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이익석(李翊碩)  1596~1661 자는 관오(寬五)이고, 호는 치천(治川)이다. 효종 8년(1657)에 경기전 참봉(慶基殿 參奉)을 역임하였다. 
이언부(李彦富)  1599~1656 호가 둔암(遯庵)이고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을 역임하였다. 죽곡파 입향조이다.
이응(李 ?)  1596~1687 자가 신보(信甫)이고, 인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거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철(李 哲)  조선시대 선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이유석(李惟碩)  1604~1657 호가 매헌(梅軒)이고, 인조 17년(163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인조 26년(1648)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고, 효종 1년(1650)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었다. 유고로 매헌집(梅軒集)이 있다.
이은(李 ?)  1604~졸년미상 인조 20년(164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비인현감(庇仁縣監)에 이르렀다. 

이유달(李惟達)  1607~1662 자가 퇴이(退而)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구(李 ?) 1607~1627 자는 숙노(叔老)이고, 인조때 무과에 급제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가 되고,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하였다. 
이수룡(李守龍) 1609~1627 호가 취죽(醉竹)이고,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이즐(李 ?)  1610~1681 호가 송남(松南)이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할 때에 왕을 수행한 공으로 인조 15년(1637) 호군(護軍)이 되었다. 
이형(李 泂)  1610~1671 인조 17년(163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과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수성(李壽星)  1610~1672 자는 여응(汝應)이고 호는 한포(寒浦)이며 정현(廷賢)의 아들이다. 완석정(浣石亭) 이언영(李彦英)의 문인이며, 형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빈(李 ?)  1610~졸년미상 효종 5년(1654)에 무과에 급제하여 보성현감(寶城縣監)을 역임하고,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이유진(李惟進)  1611~1671 자는 퇴지(退之)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극(李 克)  1612~1669 자가 여능(汝能)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유(李 濡)  1613~1678 성현찰방(省峴察訪)으로 병자호란 때 공을 세웠다. 
이기(李 淇)  1613~1679 字는 사원(泗源)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전(李 香)  1613~1674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유직(李惟直)  1615~1703 호는 독옹(禿翁)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방(李香芳) 1616~1679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와 행 충의위부사용(行忠義衛副司勇)을 역임하였다. 
이계상(李戒相) 1619~1664 관직이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이기식(李基式) 1620~1706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암(李 ?) 1623~1670 호가 월봉(月峰)이고, 현종 3년(1662) 증광시(增廣試) 문과 병과(文科丙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거쳐 고성현감(固城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선(李 善) 1625~1695 자는 이경(伊慶)이다. 보공장군 칠포만호(保功將軍漆浦萬戶)를 역임하였다. 
이원영(李元英) 1626~1682 자는 정백(亭伯)이고 호는 송고(松皐)이다. 소과에 급제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7군 훈도로서 이름을 얻었다.
이하(李香夏) 1626~1688 호가 양계(陽溪)이고, 효종 5년(1654) 춘당대 문과(春塘臺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옹원 직장(司饔院 直長), 강진현감(康津縣監),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고,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다. 
이유필(李惟苾) 1626~1722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고,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을 지냈다. 
이익명(李翊明) 1628~1667 호는 반계(盤溪)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달우(李達宇)  1629~1692 자가 자직(子直)이고, 수성(壽星)의 둘째아들이다. 숙종 12년(1686)에 진사가 되었다.
이익화(李翊華) 1629~1676 호는 옥천(玉川)이고, 사마시에 급제하여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이심(李 ?) 1632~1686 호가 경우(敬宇)이고, 사천현감(泗川縣監)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재수되었다. 
이유달(李有達) 1634~1705 자가 공저(共著)이고, 호는 수재(修齋)이다. 생원(生員)으로 일생을 보냈으나, 문장력이 뛰어나 주위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이석생(李碩生) 1635~1695 자가 안수(安秀)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와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이성민(李星民) 1636~졸년미상 무과에 급제하여 병절교위(秉節校尉)를 거쳐 용양위사과(龍?衛司果)를 역임하였다. 
이달운(李達雲) 1637~1695 字가 자수(子秀)이며 수성(壽星)의 넷째아들이다. 효우가 독실하고 위이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숙종 9년(1683)에 생원이 되었다. 
이동준(李東俊) 조선시대 호가 송제(松齊)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대건(李大健) 1641~1707 자는 원경(元慶)이다. 숙종(肅宗) 2년(167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이진호(李晉琥) 1645~1689 호가 경암(警菴)이고,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이익양(李翊亮) 1645~1710 호는 월촌(月村)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세익(李世益) 1645~1683 자는 중겸(仲謙)이고, 인조 14년(167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학정(學正)과 감찰(監察)등을 역임하였다. 
이석해(李碩海) 1652~1708 자가 군장(君章)이다. 통사랑(通仕郞)을 역임하였다.
이달지(李達枝) 1653~1714 자가 자영(子榮)으로, 훈련원(訓練院)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이달영(李達英) 1656~1694 자가 자화(子華)이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성립(李成立) 생년미상~1726 자가 행보(行甫)이고, 호는 만오(晩悟)이다. 숙종(肅宗) 31년(1705)에 무과에 급제하여 승의부위(承義副尉)에 역임하였다. 
이세노(李世老)  1663~1729 호는 원곡(元谷)이고, 학자로서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경주 육통(六通)의 입향조이다.
이노적(李老適) 1670~1731 호가 창랑(滄浪)이고, 경전에 능통하고 문장이 출중하였다. 문집1권과 창랑실기(滄浪實記)가 전하고 있다.
이민강(李敏康) 1672~1730 자가 희도(希度)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수인(李壽寅) 1676~1740 자가 차개(次開)이고, 호는 삼산(三山)이다. 숙종(肅宗) 37년(1711)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경종(景宗) 3년 (1723) 갈암(葛庵) 이현일의 복권상소(復權上疏)에 소수(疏首)로 활동하였다. 
이민의(李敏義) 1683~1752 호는 완계(浣溪)이고, 통선랑(通善郞)을 역임하였다. 
이이항(李爾沆) 1685~1735 자는 일초(一初)이고 호가 성재(省齋)이며, 문학(文學)과 기절(氣節)로 이름이 높았다. 일찍이 과장에서 고관(考官)이 사사로이 공을 도우려 하자 세도를 탄식하고 불시귀향(不試歸鄕) 하였다. 영조(英祖) 2년(1726) 성산이씨세보 병오보(丙午譜)을 만들 때에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학(李 鶴)  1690~1763 호는 국파(菊坡)이고, 용양위절충장군 겸 첨지중추부사(龍?衛折衝將軍兼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이이식(李爾湜)  1694~1773 자는 징경(澄卿)이고, 영조 49년(1773) 별은전(別恩典)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이국서(李國瑞)  1694~1774 자가 군서(君瑞)이고, 호가 수졸당(守拙堂)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 부호군 첨지중추부사(副護軍 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원달(李遠達) 생년미상~1728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적(討賊)하여 공을 세웠다.
이순안(李順安) 1700~1790 자가 인수(仁守)이고, 호가 청송(靑松)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역임하였다.
이천벽(李天碧)  1708~1763 자가 광서(光瑞)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이희진(李熙震) 1710~1793 자가 성경(聲敬)으로 여절교위(勵節校尉)를 거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이석오(李碩五) 1712~1778 자는 석지(錫之)이고 호가 구완당(苟完堂)이며 영조 30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명리에 뜻을 두지 않고 명산(鳴山)에 심원정(心遠亭)을 지어 소요자적하였다. 
이석문(李碩文) 1713~1773 자가 사실(士實) 이고 호가 돈재(遯齋)이며, 북비(北扉)공으로 세상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영조 15년(1739) 27세에 근무과(勤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영조 26년(1750)에 대리서정(代理庶政)하던 사도세자(思棹世子)에 의하여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발탁되었다가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겼다. 영조 38년(1762) 무겸(武兼)을 제수 받았는데, 이 해에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자 마침 어가를 배종하여 현장에 있었던 공에게 큰 돌을 들어 뒤주 위에 놓게 하였으나, 공은 이를 거절하고 낙직귀향(落職歸鄕)한 후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벽상에 써붙이고 조석으로 풍송(諷誦)하며 두문불출하였다. 지금 공의 고택 서편 언덕에 면우(?宇) 곽종석(郭鍾錫)이 찬(撰)한 신도비가 서 있다.

이희윤(李熙胤) 1719~1798 자가 성여(聲汝)이다. 절제도위(節制都尉) 부사(副事)를 역임하였다.
이석구(李碩九)  1721~1785 자는 성여(成汝)이고 호는 동계(東溪)이니 영조 27년(1751)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영조 36년에 옥구현감(沃構 縣監)에 제수된 것을 필두로 영해부사(寧海府使),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해진(李海鎭) 1727~1777 자는 사준(士準)이고 호는 한천(寒川)이다. 영조 27년(1751)에 문과춘당시(文科春塘試)에 급제하여 태천현감(泰川縣監)과 이조정랑(吏曹正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등을 역임하였다.
이순태(李順泰) 1728~1794 자가 흥서(興瑞)이고, 호는 모암(慕岩)이다.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다.
이천림(李天林) 1733~1791 자가 중무(仲茂)이고, 영조 50년(174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이광신(李光臣) 1738~1796 자가 도인(度仁)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충량과(忠良科)에 등과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이익한(李翼漢) 1743~1826 자는 성연(聖淵)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상렴(李尙濂) 1745~1779 자는 일지(一之)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춘우(李春遇) 1769~1836 자는 이첨(利瞻)이고,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이의소(李義沼) 1746~1796 법명이 인악(仁岳)이고, 자는 자의(子宜)이다. 18세에 승려가 되어 벽봉(碧峰), 서악(西岳), 추파(秋波) 등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영조 44년(1768) 벽봉으로 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후 동화사 주지가 되어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정조 14년(1790) 수원용주사의 창건을 주도하였고, 발원문을 지었다. 저서로는 『華嚴私記』,『圓覺私記』, 『金剛私記』, 『起信論私記』 등이 있다. 
이민수(李敏修) 1748~1812 字는 래중(來仲)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사언(李思彦) 1749~1811 字가 도유(道惟)이다. 정조 8년(1784)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과 삼수진관(三水鎭管) 외병마만호(外兵馬萬戶)를 거쳐 순조 11년(1811) 훈련원 주부(訓練院 主簿)를 거쳐 선fir장군(宣略將軍)이 되었다. 
이민행(李敏行) 1752~1822 자가 백눌(伯訥)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사겸(李思謙) 1753~1800 자가 호여(好汝)이고, 호는 기와(棄窩)이다. 정조(正祖) 7년(1783)에 명경과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사과(司果)에 이르고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를 거쳐 정조 10년(1786)에 충청도사(忠淸都事)를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이두한(李斗漢)  1753~1815 자는 서원(瑞源)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상린(李祥麟) 1754~졸년미상 관직이 보공장군(保功將軍), 충의위 호군(忠義衛護軍)에 이르렀다. 
이응권(李應權) 1756~1817 자는 군진(君眞)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에 충량과(忠良科)에 등과하여 세포만호(世浦萬戶)에 재수되었다. 
이진혁(李震爀) 1756~1819 자가 춘장(春章)이고, 호는 침천(枕泉)이다.학술에 명성이 있었으며, 임고서원(臨皐書院) 원장을 역임하였고, 문집이있다. 
이기한(李箕漢) 1758~1818 자가 춘원(春源)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원구(李元龜) 1758~1828 호가 일수(一?)이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이왕(李 ?) 1758~1830 자는 윤익(潤益)이고, 호는 송계(松溪)로서 학문과 덕망이 높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 되었다.
이시복(李時復) 1758~1799 호는 신재(愼齋)이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이규진(李奎鎭) 1763~1822 자는 이공(而拱)이며 호는 농서(農捿)이다. 정조 23년(1799)에 춘당대알성시(春塘臺謁聖試)에 장원하여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과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였으며, 그 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병조정랑(兵曺正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은율현함(殷栗懸監)을 역임하였다.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이춘만(李春滿) 1763~1813 자가 사원(士元)이다.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다. 
이응준(李應俊) 1765~1810 자는 군무(君珷)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에 충량과에 등과하여 선전관을 역임하였고,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와 경흥만호(鏡興萬戶)를 역임하였다. 
이형근(李馨根) 1767~1825 자가 여관(汝寬)이고 호는 괴청정(槐淸亭)이며, 통덕랑(通德郞)에 제수되었다.
이운한(李雲漢) 1769~1841 자가 운장(雲章)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민실(李敏實) 1772~1840 자는 경수(景樹)이고 호는 당산(唐山)이다. 순조 21년(1821) 문과정시(文科庭試)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문천군수(文川郡守) 등의 벼슬을 지내고 교서관 판교(校書館 判校)에 이르렀다.
이왕근(李旺根)  1773~1832 자가 춘우(春雨)이고, 승정원(承政院) 좌승지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다.
이수진(李秀鎭)  1775~1843 자는 덕현(德顯)이며 호는 한서(寒棲)이다. 정조 19년(1795)에 진사가 되었으며, 헌종 4년(1838)에 관찰사가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응록(李應祿)  1777~1802 자가 군옥(君玉)으로, 조선 정조 23년(1799)에 충량과에 등과하여 선략장군(宣?將軍) 내금위 부사과(內禁衛副司果)를 역임하였다. 
이이진(李?鎭) 1779~1843 자가 치양(穉養)이고, 호는 농와(聾窩)이다. 순조 5년(1805)에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하였다. 
이의인(李義仁)  1782~1864 자는 예겸(禮兼)이고, 가선대부 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이량직(李亮直)  1784~1844 호가 삼기자(三棄子)이다. 학행(學行)이 남 달랐으며, 덕림서원장(德林書院長)을 역임하였다. 
이상관(李尙寬)  1786~1867 관직이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이득운(李得運) 1789~1862 순조 5년(1805)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수문장(守門將)을 거쳐 순조 19년(1819)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이옥(李 鈺) 1791~졸년미상 호가 야천(野泉)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고 개령향교 전교, 득림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원조(李源祚) 1792~1871 자가 주현(周賢)이며, 호는 응와(凝窩)이다. 순조 9년(1809) 증광별시(增廣別試)에 응시하여 최연소(最年少)로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를 시작으로 성균관의 전적(典籍)과 직강(直講),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과 장령(掌令),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과 대사간(大司諫), 승정원(承政院)의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와 좌승지(左承旨) 및 군자감정(軍資監正)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고,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임명되었다가 곧 교체되었다. 외직으로는 결성현감(結成縣監)·강릉부사(江陵府使)·제주목사(濟州牧使)·자산부사(慈山府使)·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품계로는 27세에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었고, 50세에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거쳐 65세에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하였다. 78세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차하였다가 80세에는 다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문한(李文漢) 1794~1869 자가 자인(自仁)이고, 호는 동암(東庵)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이원훈(李源勛) 1794-1856 자가 여회(汝晦)이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역임하다.
이유호(李孺虎) 1796~1874 호는 영와(穎窩)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진해현감(鎭海縣監), 경주진영장(慶州鎭營將), 절충장군행우수사(折衝將軍行右水使)를 역임하였다. 
이욱동(李郁東) 1797~1874 호는 계남(桂南)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이준직(李準直) 1800~1875 통정대부 부호군(通政大夫 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희룡(李希龍) 1802~1873 자는 치인(致仁)이고, 호조참판(戶曹參判) 겸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이원홍(李源弘) 1803~1874 자는 주익(周翼)이고, 호는 한천(寒泉)이다. 만년에 람전(藍田)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모방하여 민속을 선도하였다. 
이민희(李民熙) 1807~1862 자가 성수(聖綏)이다. 철종 6년(1855)에 문과식년시(文科式年試)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
이병구(李秉九) 1807~1865 자는 치홍(致弘)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이규풍(李奎豊) 1811~1891 자는 문현(文賢)이고, 호는 만매(萬梅)이다. 조선 철종 1년(1850) 충량과에 등과하여 고종 19년(1882)에 통정부호군(通政副護軍)이 되었다. 
이능발(李能發) 1812~1871 호가 난재(蘭齋)이고, 가감역(假監役)을 역임하였다. 
이우(李 ?) 1816~졸년미상 호가 화산(華山)이고, 득림서원 원장과 개령향교 전교를 역임하였으며, 유고(遺稿) 2권이 있다. 
이양진(李養鎭) 1818~1872 자는 치중(致重)이다. 조선 철종 1년(1850)에 무과에 급제하고, 철종 3년(1852)에 충량과를 거쳐 수문장(守門將)이 되었다. 
이진상(李震相) 1818~1886 자는 여뢰(汝雷)이고 호가 한주(寒洲)이며 학자들은 포상(浦上)선생 주상(洲上)선생이라 호칭하였다. 18세에 성명도설(性命圖說)을 시작으로 평생동안 85책의 저술을 남겼으며, 이 가운데 문집 42권 22책과 이학종요(理學綜要)·사례집요(四禮輯要)·춘추집전(春秋集傳)은 이미 목판으로 간행되었고, 나머지 저술은 현대에 와서 거간의 저술들과 함께 한주전서(寒洲全書)로 합간되었다. 정사(精舍)에 조운헌도(祖雲憲陶)의 편액을 걸어 주자(朱子)와 퇴계(退溪)의 학문을 사숙함을 표방하였고, 현대학자들에 의하여 화서(華西)이항로(李恒老)·노사(蘆沙)기정진(奇正鎭)과 함께 근세유학 3대가(近世儒學三大家)로 불리워지거나, 퇴계(退溪)이황(李滉)·율곡(栗谷)이이(李珥)·화담(花潭)서경덕(徐敬德)·노사(蘆沙)기정진(奇正鎭)·록문(鹿門)임성주(任聖周)등과 함께 이학 6대가(理學六大家)로 꼽힌다.
이도계(李道啓) 1820~1884 현종 13년(1847)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역임하였다. 
이택조(李宅祚) 1821~1882 자는 춘원(春元)이고, 행충무위부사용(行忠武衛副司勇)을 거쳐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역임하였다. 
이규상(李奎相) 1822~1874 자는 취백(聚伯)이고, 호는 소석(小石)이다. 철종 13년(1862)에 삼정문란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며 유학자로서 유고(遺稿)가 있다. 
이철중(李喆重) 1824~1875 자가 사안(士安)이고, 헌종 10년(1844)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이호(李 灝) 1824~1903 호는 만괴(晩槐)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었다. 
이원영(李元永) 1825~1892 자는 내직(乃直)이고 보명(譜名)은 병원(秉源)이다. 선략장군(宣略將軍)이 되어 용양위부사과(龍?衛副司果)를 역임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피봉되었다.
이양철(李養哲) 1826~1887 자는 광욱(光郁)이고,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이동상(李東相) 1828~1897 호가 학포(學圃)이고, 고종 6년(186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다. 
이기상(李驥相) 1829~1903 자는 치천(穉千)이고 호는 민와(敏窩)이니 응와(凝窩)의 차자(次子)이다. 종형 한주(寒洲)를 따라 학문을 익혔다.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제수되었다. 
이구상(李龜相) 1829~1890 자는 치등(穉登)이며 호는 포석(蒲石)이다. 고종 19년(1882)에 문과정시(文科庭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성균관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으며, 동학교수(東學敎授)와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이운상(李雲相) 1829~1891 자는 여림(汝霖)이고, 호는 담와(澹窩)이다. 문예가 출중하였으며, 고종18년(1881) 영남 유생들의 척사만인소(斥邪萬人疏)를 주관하였다.
이문승(李文升) 1830~1891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가 원석(圓石)이다. 한의술(韓醫術)이 저명하였으며, 성주 문방리에 고산숙(高山塾) 서당을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였고, 빈민구제에 노력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도권(李道權) 1830~1896 자가 화실(和實)이고,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원표(李元杓) 1830~1877 무과에 급제하여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진팔(李震八) 1831~1907 자가 원거(元擧)이다. 통정대부(通正大夫), 개령향교 전교, 금오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석희(李錫熙) 1834~1894 자는 여윤(汝允)으로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이만수(李萬秀) 1835~1910 자는 운서(云瑞)이다. 고종 13년(1876)에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이호두(李浩斗) 1842~1918 호는 호은(湖隱)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이승조(李承祚) 1844~1894 자는 성원(性元)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역임하였다.
이용우(李容愚) 1845~1912 자가 춘가(春可)이고, 호가 청농(靑濃)이다. 개령향교 전교와 덕림서원원장, 금오서원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지달(李志達) 1845~1917 고종 31년(1894)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이승희(李承熙) 1847~1916 자는 계도(啓道)이고, 호는 대계(大溪)·한계(韓溪)이다. 유신(儒臣)의 천(薦)으로 원구단참봉(圓丘壇參奉)·장릉참봉(章陵參奉)·조경묘참봉(肇慶廟參奉) 등에 제수되었으며, 1908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밀산부(密山府)에 한흥동(韓興洞)을 세우고 이후 중국에서 동포의 교육과 광복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다가 봉천(奉天) 여사(旅舍)에서 병사하였다.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지하(李志夏) 1848~1871 자는 여행(汝行)이고,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이승표(李承杓) 1848~1933 호는 만와(晩窩)이고,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역임하였다. 
이은필(李殷弼) 1852~졸년미상 자는 경순(景純)이고, 찰방(察訪)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역임하였다. 
이동근(李東根) 1853~1922 자가 준여(俊汝)이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이석욱(李碩旭) 조선시대 자가 춘일(春日)이고, 통정대부(通正大夫)에 증직되었다. 
이권진(李權鎭) 조선시대 자가 경칠(敬七)이고, 통정대부(通正大夫)를 역임하였다. 
이원구(李源九) 조선시대 자가 기언(基彦)이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이희로(李熙魯) 1854~1914 호는 동암(東庵)이고, 경전을 강학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문집이 있다. 
이용희(李庸熙) 1854~1919 자는 자중(子仲)이고, 호가 덕산(德山)이다. 효능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이방근(李芳根) 1855~1909 자가 성회(聖晦)로서 조선 고종 25년(1888)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이 되고, 충좌위 부사과(忠佐衛副司果)를 역임하였다. 
이성근(李成根) 1856~1917 자가 주숙(周叔)이고, 호는 사의(四宜)이다. 학문이 깊었으며, 만년에 충의제(忠義齊)를 지어 후학을 지도하고 사제를 털어 구휼하였다. 유고 2권이 있다.
이두훈(李斗勳) 1856~1918 호는 홍와(弘窩)로서, 한주(寒洲)의 문하생으로 한계(韓溪)선생을 도와 만주의 밀산부(密山府)에서 한국독립운동기지창설에 참여하였고,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글을 작성하여 각국 공사관에 송부하였다. 신안문집(新安文集) 7권과 동화세기(東華世紀) 10권이 있다.
이만상(李萬相) 1857~1900 字는 방헌(邦憲)이고, 호는 교재(橋齋)이다.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이론이 매우 심오하였다. 
이지용(李志鎔) 1859~1886 자는 경도(景道)이다. 통덕랑(通德郞)이 되었으나 28세에 卒하였다. 
이철희(李哲熙) 1859~1938 자는 명오(明吾)이고, 호는 노암(老巖)이다. 사림의 추대로 노강서원(老江書院) 종신당장을 역임하였고, 유고(遺稿)가 있다. 
이영훈(李英勳) 1860~1887 호는 옥서(玉西)이고,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익필(李翼弼) 1860~졸년미상 자는 순여(舜汝)이고, 고종 25년(1888)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역임하였다. 
이우훈(李寓勳) 1860~1928 자는 명국(明國)이고, 호가 독산(獨山)이다. 경서(經書)와 사서에 능통하여 존경을 받았다. 
이지협(李志協) 1861~1937 자는 덕노(德老)이고, 중추원의관을 역임하였다.
이희수(李熙守) 1862~1906 관직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과 황산찰방(黃山察訪), 연서찰방(延曙察訪)을 역임하고, 비서승(秘書丞)을 지냈다. 
이영표(李榮杓) 1863~1927 호는 송은(松隱)이고, 사림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이 있다. 
이희권(李熙權)  1864~1912 자는 덕수(德銖)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였다. 
이일희(李一熙)  1864~1929 자가 겸오(兼五)이다. 고종 8년(1904)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을 역임하고, 고종 10년(1906)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제수되었다. 
이병규(李炳奎)  1864~1936 연제 송병선(淵齊 宋秉璿)의 문인으로서 문집 4권이 있다.
이주희(李澍熙) 1866~1946 자는 덕형(德亨)이고 호는 극와(極窩)이다. 주역(周易)을 송독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한일합방 후에는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 칩거(蟄居)하였다. 
이기두(李基斗) 1867~1920 자가 성중(星重)이고, 호가 이계(伊溪)이다. 학문에 열중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이계유고(伊溪遺稿)가 있다. 
이기용(李基容) 1867~1933 자는 도흥(道興)이며 호는 회우(悔宇)이다. 1898년 태학경과시(太學經科試)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동지(冬至)에 고종의 원구단(圓丘壇) 친제(親祭)에 봉조관(奉俎官)으로 종사하여 육품(六品)으로 승품되었다. 
이한기(李漢基) 1868~1945 호는 괴은(槐隱)이고, 효능참봉(孝陵參奉)을 역임하였으며, 침수정(枕漱亭)이 있고 문집이 있다.
이진기(李鎭基) 1868~1928 호는 계암(溪菴)이고, 사림학자로서 임고서원 중건에 노력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이기형(李基馨) 1868~1946 자는 맹원(孟遠)이고 호는 성와(惺窩)이다.
한일합방 이후 타인과 접촉을 끊고 선재(先齋)인 월봉정(月峯亭)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기미년에 면우(?宇) 곽종석(郭鍾錫), 회당(晦堂) 장석 영(張錫英) 등과 도모하여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대한독립을 호소한 유림단 파리장서사건(儒林團巴里長書事件)을 주동하여 옥고를 치렀다.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인재(李寅梓) 1870-1929 자는 여재(汝材)이고, 호는 성와(省窩)이다. 면우(?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고, 일제치하에는 하산정사(霞山精舍)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면서 은거하였다. 저서로 구경연의(九經衍義),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등이 있다.
이인광(李寅光) 1878~1934 자가 중실(仲實)이며, 파리장서에 서명한 애국지사로서 옥고를 치루었으며 유고 3권이 있다.
이수인(李洙仁) 1880~1962 호가 침산(枕山)이고, 광무 9년(1905)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시에 해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에귀국하여 옥고를 치루었다.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경(李 俓) 1880~1939 호는 진화(珍和)이고,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이근익(李根翊) 1883~1963 호가 구암(龜岩)이고, 상주향교 전교와 옥동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이기정(李基定) 1883~1953 字는 충부(忠夫)이고, 號는 이재(彛齋)이며,경사(經史)에 밝았다. 기미년 삼일운동으로 옥고 1년을 겪고 파리장서 서명운동에 참가한 사건과 독립자금 모금으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망국의 통한을 기록한 규양록(葵陽錄) 2권을 남겼다. 건국공훈으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기원(李基元) 1885~1982 자는 자건(子健)이고, 호는 삼주(三洲)로서 한주(寒洲)의 손자이며 한계(韓溪)의 아들이다. 1925년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영남유림단(嶺南儒林團)을 결성 하였다가 발각되어 대구감옥 에서 1년을 복역하였다. 광복 후 심산과 함께 유도회(儒道會)를 창설하여 성균관을 국가로부터 되돌려 받아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성균관대학교 설립에 공을 세웠다. 건국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규승(李奎承) 1885~1969 자가 좌경(左卿)이고, 호가 대헌(大軒)이다. 개령향교 전교와 유도회장, 금오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이완(李 ?) 1887~1959 자는 성순(性純)이고, 중국 육군에서 장군으로 활동하였다. 
이근기(李謹基) 1887~1947 호는 돈산(遯山)이고,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이민(李 珉) 1889~1973 자는 맹규(孟奎)이고, 호는 송반(松?)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후에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연재(淵齋) 송병준(宋秉埈)의 문인으로 옥계서원(玉溪書院) 원장과 주자영당(朱子影堂) 당장을 역임하였다.
이기윤(李基允) 1891~1971 자는 집중(執中)이고 호는 극암(克菴)이다. 박학독행(博學篤行)하여 금지고인(今之古人)으로 호칭되었다. 파리장서사건 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는데, 그 공으로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았다. 
이한기(李漢騏) 1894~1954 호는 근당(槿堂)이고, 송설재단(松雪財團) 이사장으로, 김천중·고와 감문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영식(李永植) 1894~1981 호는 성산(惺山), 계성학교와 일본고배신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대구항일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서울형무소에서 도 항일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 목사를 거쳐 대구애생원 나환자교회 목사가 되고, 대구맹아학교 를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하였다. 한국사회사업대학(현대구대학교전신) 초대학장과 영광학원(榮光學園)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문화훈장 국민장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덕균(李悳均) 1898~1968 학문이 정박하였으며, 평생 후학양성에 노력 하였다. 문집 2권이 있다. 
이호석(李浩錫) 1901~1959 자가 치형(致亨)이며, 제헌국회의원과 민선 대구시장을 역임하였다.
이헌호(李憲浩) 1902~1971 속명이 찬호(讚浩)이고, 승려로서 법명이 순호(淳浩) 청담(靑潭)이다. 진주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초대총무원장과 조계종 중앙종회의의장, 해인사 주지, 동국학원 이사장, 조계종 제2대 종정, 세계불교연합장로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信徒水鏡』, 『般若心經講說』, 『金剛經大講座』, 『禪入門』 등이 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하였다.
이인(李 仁) 1905~1969 자는 인필(仁弼)이고, 호는 남계(南溪)이다. 동경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오산중학교 교사와 경북중학교 교사를 거쳐, 경북여자중·고등학교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1949년에 고령중학교의 창설교장이 되고, 이어 고령고등학교, 고령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 장을 겸직하였다. 홍조근정훈장을 수훈하였다. 
이효상(李孝祥) 1906~1989 호는 한솔, 대구고보와 동경제국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대구교남학교(현대륜고등학교)교장, 경상북도 학무국장, 경북대 문리과대 교수가 되고, 밸기에 류뱅가톨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 으며, 경북대 문리과대학장, 참의원 의원, 국회의원, 국회의장, 영남학원이 사장을 역임하였다.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文化와 宗敎』, 『敎育의 根本問題』 외에 시집으로 『산』, 『사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