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남원진씨 시조(南原晋氏),진함조(晋含祚),남원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8-03-05 16:23 수정일 : 2019-02-12 12:02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진씨(晋氏)는 중국(中國) 괵군(虢郡 : 지금의 하남성 하락도)에서 계출(屆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사람인 진휘자(晋暉者)의 후손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진씨는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한 진함조(晋含祚)를 시조로 하는데 그는 역학(易學)과 술수(術數)에 정통하여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도참설(圖讖說)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후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와서 후손(後孫) 석(錫)이 거란군(契丹軍)의 침입을 토평하는데 공(功)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남원(南原)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곳에서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남원(南原)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의 기록에 진씨(晋氏)의 본관(本貫)은 남원(南原)을 비롯하여 13본(本)이 전(傳)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남원(南原) 단본(單本)으로 알려진다.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高麗)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구으로 고치고 1360년(공민왕 9) 부(府)로 승격, 1739년(영조 15)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고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 32) 남원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말에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지낸 우란(于蘭)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두류산(頭流山)에 은거(隱居)하여 끝까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이 일어나자 창의(倡義) 한 벽(壁)은 여러 곳에서 왜군(倭軍)을 맞아 싸워서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운 후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한편 인조(仁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종립(宗立)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김준용(金俊龍)의 휘하에서 수원 광교(水原廣橋) 전투에 참전하여 적장(敵將)을 사살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창복(昌復)은 박사(博士)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원진씨는 전국에 7,1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 남원진씨조상인물 

진광인(晋光仁) 고려 명종(明宗) 때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剛直)하고 청백(淸白)하였으며, 조정의 기강(紀剛)을 바 로 잡는데 앞장서 직간(直諫)하다가 권신세도(權臣勢徒)들의 농간으 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진석(晋 錫) 호(號)는 수은(睡隱), 시호(諡號)는 충경(忠敬), 광인(光 仁)의 아들. 고려 고종(高宗)이 김양경(金良鏡)을 시켜 누차 출사(出 仕)할 것을 권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거란이 침입하자 즉시 일어나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진효순(晋孝純) 고려(高麗)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진우란(晋于蘭) 고려조에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를 지냈다.

진벽(晋 璧) 조선 선조(宣祖) 때 좌승지(左承旨)로서 임진왜란이 일 어나자 창의(倡義)하여 여러 곳에서 왜군을 막아 혁혁한 전공(戰功) 을 세웠다.

진종립(晋宗立)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진창복(晋昌復) 조선조에서 성균관 박사(博士)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