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중화양씨시조(中和楊氏),양포(楊浦),중화양씨조상인물,양희지(楊熙止)

작성일 : 2018-03-05 15:19

중화양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중화양씨(中和楊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때 정승(政丞)을 역임하고 당악(唐岳 : 중국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진 양포(楊浦)를 시조(始祖)로 하고 중화(中和)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중화(中和)는 평안남도(平安南道) 남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가화압(加火押)인데 통일신라(統一新羅) 헌덕왕(憲德王)이 당악현(唐嶽縣)이라 하였고, 고려(高麗) 초에 서경(西京)에 편입시켰다가 인종(仁宗) 때 9촌(村)을 합하여 중화현을 만들고 영(令)을 두어 서경의 속현이 되었다. 1322년(충숙왕 9)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 임진왜란 때 부(府)가 되었고, 1895년(고종 32) 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 상원군(祥原郡)을 합쳤다.


대표적인 인물

시조(始祖) 이후 포(浦)의 아들 동무(東茂)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경무(慶茂)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견무(堅茂)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고, 5세손 원격(元格)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8세손 희지(熙止)는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고 대사간(大司諫)과 관찰사(觀察使)․도승지(都承旨)를 거쳐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에 올랐다. 또한 학자(學者)로 이름난 덕록(德祿)은 임진왜란 때 종질(從姪) 의직(懿直)의 증손 현망(顯望)은 현종(顯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부사(府使) 등 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名望)이 높았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전국에 7,28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중화양씨조상인물

양동무(楊東茂): 고려(高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양 기(楊 基): 고려(高麗)에서 전서(典書)를 지냈다.

양백후(楊伯厚): 고려조(高麗朝)에 부령(副令)을 지냈다.

양원격(楊元格): 조선(朝鮮) 때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양자웅(楊自雄): 조선조(朝鮮朝)에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양백지(楊百枝): 조선(朝鮮) 때 전서(典書)를 지냈다.

양수사(楊守泗): 조선(朝鮮)에서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양희지(楊熙止): 1439년(세종 21)~1504(연산군 10). 자(字)는 가행(可行), 호(號)는 대봉(大峰), 군수(郡守) 맹순(孟淳)의 아들. 1462년(세조 8)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1464년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 동료를 이끌고 원각사(圓覺寺) 개창안(改創案)에 맹렬히 반대했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종(成宗)의 부름으로 편전(便殿)에서 알현, 희지(稀枝)라는 이름과 정보(楨父)라는 자(字)를 하사(下賜)받고(뒤에 다시 초명을 사용했음)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1478년(성종 9) 부수찬(副修撰)에 올라 경연관(經筵官)을 겸직, 이어 교리(校理)․문학(文學)․검상(檢詳)․대사간(大司諫)․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직제학(直提學)을 겸했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사퇴, 뒤에 대사헌(大司憲)․부제학(副提學)․형조 참판(刑曹參判) 등으로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00년 대사간으로서 무오사화로 국변(國邊)에 유배된 자들을 남쪽 지방으로 이배(移配)케 했다가 노사신(盧思愼)․류자광(柳子光) 등의 논핵(論劾)으로 삭직(削職), 전리(田里)에 방축(放逐)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복관(復官)되고,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으나 곧 병사했다. 글씨를 잘 썼다. 대구(大丘)의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양의직(楊懿直): 1556(명종 11)~1639(인조 17) 자(字)는 이온(而溫), 호(號)는 정세(靖世), 생원(生員) 덕유(德裕)의 아들. 학문의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심하다가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성책(守城策)을 건의하여 선조의 찬탄을 받았으며 종숙(從叔)․덕록(德祿)과 함께 의병을 규합, 적개군(敵愾軍)이라 하여 사근교(沙斤橋)에서 적군의 진로(進路)를 막아 강서(江西)를 침범 못하게 했고, 1593년 명(明)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平壤) 탈환에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3천 석(石)의 군량미를 수집, 그 공으로 창릉 참봉(昌陵參奉)으로 임명되었으나 사퇴,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비했다.「역전(易傳)」․「예의회통(禮儀會通)」등을 저술했으나 호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양덕록(楊德祿): 1553(명종 8)~1635(인조 13) 자(字)는 경수(景綏), 호(號)는 회헌(悔軒).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으며 특히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서(兵書)를 탐독했다. 1588년(선조 21) 윤두수(尹斗壽)가 평안도를 순찰,「평양지(平壤誌)」를 편찬할 때 그를 도왔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적개군(敵愾軍)이라 일컫고 여러 곳에서 활약했다. 이듬해 명(明)나라 군사를 도와 평양 수복에 공헌, 한편 전란으로 불탄 홍범서원(洪範書院)을 중건(重建)하여 인현서원(仁賢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다시 의병을 모아 3천 석의 군량을 조달, 그 공으로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유생(儒生)들을 이끌고 문묘(文廟)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피난했다.

양현망(楊顯望):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군수(郡守)․부사(府使) 등을 역임하고 이어 예조 정랑(禮曹正郞)․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양만영(楊萬榮):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결성 현감(結城縣監)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