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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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8-01-07 09:26 수정일 : 2019-11-26 14:22

강릉최씨시조 및 강릉최씨본관의 유래

강릉(江陵)은 강원도 영동(嶺東) 지방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상고시대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다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개칭하여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라 하였다. 550년(진흥왕 11)에 신라의 영토가 되어 선덕여왕(善德女王) 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가 태종무열왕조(太宗武烈王朝)에 하서주(河西州)로 개편, 경덕왕(景德王) 때는 명주(溟洲)로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가 동원경(凍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으며 940년(태조 23)에 다시 명주로 고쳤다.

성종(成宗) 때는 처음에 하서부(河西府)로 하다가 986년(성종 5)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개칭하고 두에 목(牧)으로 하였으며,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을 10도(道)로 나눌 때 삭방도(朔方道)의 중심지가 되어 함경도를 비롯한 영동 일대와 영서(嶺西)의 춘천(春川) 이북등지를 관할하였다. 1179년(명종 8) 연해명주도((沿海溟洲道)로 개칭하고 원종조(元宗朝)에는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강릉도(江陵道)로, 충렬왕(忠烈王) 때 강릉부(江陵府)로, 공민왕(恭愍王) 때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우왕(禑王) 때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로 하다가 공양왕(恭讓王)이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임영(臨瀛)이라 하였다.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강원도로 개칭되어 세조(世祖)가 진(鎭)을 설치하였고, 1666년(현종 7) 원양도(原襄道)로 고쳐 강릉현(江陵縣)으로 가능하였으며, 정조(正祖) 때 원춘도(原春道)라 하다가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13도제(道制) 실시로 강원도 강릉군(江陵郡)이 되어 21개 면(面)을 관할하다가 1931년 강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고, 1955년 9월 1일 성덕면(城德面)과 경포면(鏡浦面)을 편입하여 강릉시(江陵市)가 되었다.


강릉최씨(江陵崔氏)는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도 상계(上系)를 달리 하는 다음 3계통(系統)이 있다.

첫째는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韓璧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계통이고,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계통이며, 또 다른 한 계통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夫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齎) 최문한(崔文漢)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이들 각 계통별로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洲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 한주(翰注)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洲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들, 필달․숭언․한주는 강릉 최씨가 자랑하는 <삼군(三君)>이다.


고려 말에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지내고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동강(東崗) 원량(元亮)의 손자 치운(致雲 : 국자생원 안린의 아들)은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명신(名臣)으로 세종(世宗) 때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겼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1390년(공양왕 2) 6월 19일 강릉(江陵)에서 태어난 조은(釣隱) 치운(致雲)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덕망(德望)과 식견(識見)을 인정받아 국정(國政)을 논할 때마다 왕(王)의 자문에 응했고, 다섯 차례나 명(明)나라를 다녀오면서 외교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은(釣隱)은 왕명(王命)을 받아「대명률(大明律)」참고로「무원록(無寃錄)」을 주해(註解)하여 위로는 형조(刑曹)로부터 아래로 군옥(郡獄)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고, 천성이 청백하여 왕(王)이 내려준 전답(田畓)과 노비(奴婢)를 일곱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는 평소에 술을 좋아했는데, 세종(世宗)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친필(親筆)로 계주(戒酒)의 어찰(御札)을 내려 주었다. 조은은 그 어찰을 벽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대마다 경계하였는데, 어쩌다가 바깥에서 폭음(暴飮)을 하고 오는 경욱, 부인이 머리를 들어 주면서 어찰이 붙은 벽을 가리켜 보이면 취중에도 번번이 사죄(謝罪)하는 모습을 지었다고 하며, 술이 깨면 “내 임금의 은혜에 느껴서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잡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응현(應現)은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애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 훈도(江陵訓導)에 머무르다가 세조(世祖)때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 직을 억지로 받게 되자 6년의 의무기간 동안 고향 근방의 수령(守令)직을 주청(奏請)하여 영월(寧越)과 고성(高城)을 맡아 목민관(牧民官)의 임무를 다했다.

1480년(성종 11)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자 여막(旅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한번도 집에 내려오지 않았으며 3년상을 마치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예조 참의(禮曹參議)․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경주부윤(慶州府尹)․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역임했다.


한편 응현(應現)의 세째 아들로 1504년(연산군 10)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했던 세절(世節)은 당시 폭군의 난정이 극심하였던 시대라 억울하게도 그 해에 등과(登科)한 이들의 발표가 보류된 채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맞았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의 중신이 되어 <신(臣) 등은 등과(登科) 출신으로서, 비록 얼마 안되는 효(效)도 남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문반(文班)의 일원(一員)으로서 갖출 바를 갖추고 그 이력(履歷)을 쌓은 지는 오래입니다. 오늘날 방(榜)을 파(罷)하고 직(職)을 거두어 한 포의지사(布衣之士)가 되었으니 새삼스레 유관(儒冠)을 쓰고 성균관에 나가려 하여도 후배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물러나서 전묘(田畝:밭이랑)에 엎드리려 하여도 평화로운 세상에 버린 물건이 될 것이 뻔하온데…>로 시작되는 장문(長文)의 상소(上疏)를 올려 왕으로 부터 인정을 받아 장원급제를 추인(追認)받게 되었다.

그 후 성균과 전적(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벼슬에 올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좌우부 승지(左右副丞旨), 황해(黃海)와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대사헌(大司憲)․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형․호조(刑戶曹)의 판서(判書)를 지냈다.


한훤당(寒喧當) 김광필(金宏弼)의 고제(高弟)로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문장(文章)과 서예(書藝)․미술․음악 등에 출중(出衆)하여 <사절(四絶)>이라 불리웠던 수성 (壽峸)은 어려서부터 의지(意志)와 기개(氣槪)가 남달리 고매하고 지혜가 뛰어나서 19세 때 이미 문예(文藝)에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원흉(元兇)이었던 남 곤(南 袞)이 산수도(山水圖) 한 폭을 김 정(金 淨)에게 보내어 화제를 요구해왔다. 마침 수성이 김 정의 집을 방문했다가 이를 보고 그 위에 쓰기를 <떨어지는 해는 서산으로 내리고 외로운 연기는 먼 나무에서 나온다, 복건 쓴 서너사람 망천의 주인은 누구인고>라고 하였다가 남 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후 수성은 시국 형편에 강개하여 승지(承旨)로 있던 숙부(叔父) 세절(細切)에게 “세사가 이같이 되어가는데 굳이 벼슬하여 무엇을 구하고저 하시요. 안전하게 산수간(山水間)에서 여생을 보전하는 것만 못할 겁니다.”하며 다음과 같은 시(詩)를 보냈다. <해 저문 창강 위에 날은 차고 물결이 저로 이네, 외로운 저 배 일찌감치 대여라 밤이 오면 풍랑이 높아지리>

1519년(중종 14) 안처겸(安處謙) 일당이 일으킨 신사무옥(辛巳誣獄) 때 수성은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끝내 극형에 처해졌다. 1521년(중종 16) 10월 21일 진시(辰時)에 처형되니 이 때 수성의 나이는 35세였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날 흰 무지개가 태양을 뚫고 지나가고 하늘이 수 백리가 진동하였다고 하며, 짙은 안개가 사방을 가려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된 지가 수일이나 되었다고 한다.

수성의 제자(弟子) 이달형(李達亨)이 발(簾)로써 시체를 염습하여 산골에 임시로 가매장하고 밤에 그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꿈에 수성이 나타나 <적막한 내 무덤을 뉘라서 찾아오리, 처절한 원숭이 소리나 벗하련다, 발에 싸여 온 후, 멀리 시체 덮어준 그 사람을 생각하노라>하는 시(詩)를 읊었다.

임진왜란 때 28세로 백의창의(白衣倡義)하여 전공을 세웠던 배천(配天)은 선조(宣祖)로부터 어의(御衣)와 망건(網巾) 등을 하사(下賜)받고 회령 교수(會寧敎授)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역임했다.


세절(世節)의 증손이며 수성(壽峸)의 손자인 기벽(基鐴)은 광해군(光海君) 때 박사(博士)로서 태학(太學)인 성균관에서 교수(敎授)하고 있을 때 영창대군(永昌大君: 선조의 아들, 인목대비의 소생)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江華島)에 위리안치시키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페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대궐에 나가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구법(九法)이 무너졌나이다.” 하며 극간(極諫)을 하였고, 조카 문한(文漢)으로 하여금 당시 전횡을 일삼던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목을 베라는 항소문(抗疏文)을 올리도록 하였다가 동생 기백(基銆)과 함께 성균관에서 퇴관당하여 향리인 원주(原州)로 내려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억울함이 풀렸다.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강릉 최씨를 더욱 빛냈는데, 맏아들 문오(文澳)는 군수(郡守)를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고, 차남 문활(文活)은 군수(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세째 문발(文潑)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고 시주(詩酒)와 더불어 보내며 595수(首)의 주옥(珠玉) 같은 시(詩)를 3권 2책에 담은「취석시집(醉石詩集)」을 나겼다. 막내 문식(文湜)은 1630년(인조 8) 중형인 문활(文活)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헌종(憲宗) 때 장령(掌令)고 헌납(獻納)을 지내고 숙종조(肅宗朝)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 ․예조참판․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했다.


고려 태조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후손에서는 그의 12세손 입지(立之)가 고려조에서 문하평리(門下評理)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증직되어 강릉군(江陵君)에 추봉되어 후손들이 강릉(江陵)에, 차남 안빈(安瀕)은 이부 전서(吏部典書)로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고, 막내 안면(安沔)은 이부 전서를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그외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던 유연(有漣:안소의 아들)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유의(有漪) 형제가 유명했으며, 유연의 아들 이 (迤)는 조선 초기에 대사헌(大司憲)과 공조(工曹) 및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경상도 도관찰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경인(景仁)이 감사(監司)를 역임했다.


충숙왕(忠肅王)의 딸 선덕공주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던 문한(文漢)은 기울어져가는 고려(高麗)의 국운을 일으켜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자기를 태우고 동분서주하던 애마(愛馬)가 강릉 옥천동 용지(龍池)에서 용(龍)으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는 고려의 운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그대로 강릉에 정착하여 강릉 최씨의 또다른 계통의 시조가 되었다.

충재공(忠齋公) 문한(文漢)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윤(允)이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역임한 후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슬하에 아들 3형제 중 둘째 자호(自湖)는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막내 자점(自霑)은 성종(成宗) 대 등과(登科)하여 감찰(監察)과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평강(平康)․고성(高城)․금성(金城) 등지의 군수(郡守)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겨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1525년(중종 20)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했던 연(演: 자점의 손자)은 호당(湖堂)에 선임되어 사가독서를 했으며,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과 수찬(修撰)․장령(掌令)․필선(弼善) 등을 거쳐 충청도 어사(忠淸道御史)로 나가 민정을 살폈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를 지낸 후 인종(人種) 때 중종의「애책문(哀冊文)」과「시책문(諡冊文)」을 지었다. 그 후 명종(明宗) 초에 지중추부사와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지의금부사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明)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조카 운우(雲雨)는 명종(明宗) 때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역임했고,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응천(應天)이 문장(文章)과 서예(書藝)․음율(音律) 등에 정통하여 문명을 떨침으로써 강릉 최씨를 더욱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릉최씨(江陵崔氏)는 145,33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릉최씨 세계도 


역대인물(歷代人物)-강릉최씨조상

<필달계(必達系)>

최숭언(崔崇彦) 고려조(高麗朝)에 판사(判事)를 역임하였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라 명주부원군(溟洲府院君)에 봉(封)하여졌다.

최광조(崔光朝) 고려조(高麗朝)에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최정(崔 靖)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최겸(崔 謙) 고려(高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최군(崔 羣) 고려조에 상의국 봉어(尙衣局奉御)를 지냈다.

최민부(崔敏富) 고려(高麗) 때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최희식(崔希植) 고려조(高麗朝)에 천호장(千戶長)을 지냈다.

최주(崔 柱)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최한주(崔漢柱) 고려조(高麗朝)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고 명주군(溟洲君)에 봉해졌으며, 울진(蔚珍) 죽포사에 배향(配享)되었다.

최개(崔 愷) 고려조에 천호장(千戶長)․제학(提學)을 지냈다.

최추(崔 湫) 고려조에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전농시 소윤(典農寺少尹)에 증직(贈職)되었다.

최문옥(崔文沃)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역임하였다.

최원량(崔元亮) 호(號)는 동강(東崗). 고려조(高麗朝)에 진사(進士)․생원(生員) 양시(兩試)에 합격한 후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거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역임하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최서(崔 湑) 고려조에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최구년(崔龜年) 고려조(高麗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최안린(崔安麟) 호(號)는 동헌(東軒).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최안봉(崔安鳳) 조선조(朝鮮朝)에 낭장(郎將)을 지냈다.

최정유(崔正濡)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천유(崔天濡) 제학공(提學公) 개(愷)의 증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재(文才)가 뛰어나 1390년(고려 공양왕 2)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394년(태종 3)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최득유(崔得濡)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최천계(崔天啓) 자(字)는 문옹(文翁). 조선조(朝鮮朝)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최치운(崔致雲) 1390(공양왕 2)~1440(세종 22) 자(字)는 백경(伯卿), 호9號)는 경호(鏡湖)․조은(釣隱), 삼사 좌윤(三司左尹) 원량(元亮)의 손자. 어릴 때부터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 1408년 19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417년(태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후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1433년(세종 15) 이만주(李滿住)가 변경을 침범하자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이 되어 야인(野人) 정벌에 공을 세우고 돌아와 참의․승지를 역임했고, 1439년(세종 21)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건너가서 야인 회유에 관한 의논을 했으며, 그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나라에 왕래하며 외교적 공적을 쌓았다.

한편 왕명으로 무원록(無寃錄)을 주석(註釋)하고 율문을 강해하는등 형옥(刑獄)에 관하여 왕에게 자문을 올렸고, 뒤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랐다. 강릉 향현사(江陵 鄕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최계손(崔繼孫) 판윤(判尹) 천유(天濡)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암(崔 庵) 자(字)는 가거(可居).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정언(正言)을 지냈다.

최점(崔 店)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감찰(監察)을 역임하였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최준(崔 峻) 조선조(朝鮮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중화 부사(中和府使)를 지냈다.

최진현(崔進賢) 자(字)는 국신(國臣), 호(號)는 한송자(寒松子), 참판(參判) 치운(致雲)의 아들. 조선 문종조(文宗朝)에 생원(生員)이 되고 음사(蔭仕)로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최응현(崔應賢) 1428(세종 10)~1507(중종 2) 자(字)는 보신(寶迅), 호(號)는 수헌(睡軒), 이조 참판(吏曹參判)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1448년(세종 30) 사마시(司馬試)에 합겨, 1454년(단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보직되었으나 노모으 봉양을 위해 강릉 훈도(江陵訓導)에 자원해 나갔다.

그후 승문원(承文院)의 저작 및 박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480년(성종 11) 모친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으며, 그후 집의(執義)․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이조 참의(吏曹參議) 등을 거쳐 승정원 부승지(承政院副承旨)․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91년(성종 22)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올랐고 1495년(연산군 1)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02년(연산군 8)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및 공조․형조․병조 참판을 역임한 후75세의 고령으로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치사(致仕)하고 낙향하여 일생을 보냈으며, 강릉(江陵)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유고(遺稿)로「유일고부록(有逸稿附錄)」․「임영세고(臨瀛世稿)」․「상례고정편(喪禮考正編)」을 남겼다.

최간(崔 澣) 참의(參議) 계손(繼孫)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승의부위(承義副慰)를 거쳐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최미(崔 梶) 정언(正言) 암(痷)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최명손(崔命孫) 자(字)는 윤보(胤甫). 조선 세조조(世祖朝)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이조 정랑(吏曹正郞) 겸 교리(敎理)를 역임하였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최상인(崔尙仁)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를 지냈다.

최호인(崔好仁) 조선 태조조(太祖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최호의(崔好義)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최세절(崔世節) ?~1535(중종 30) 자(字)는 개지(介之), 호(號)는 매창(梅窓), 조은공(釣隱公) 치운(致雲)의 손자(孫子), 수헌공(睡軒公) 응현(應賢)의 아들. 1498년(연산군4) 소과(小科)에 합겨, 1504년(연산군 10) 별시문과(別時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1506년(중종 원년)에 성균과 전적(成均館典籍)에 올랐고 사헌부정언(司憲府正言)․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으면서 호당(湖當)에 선임되었다.

그후 이조 정랑(吏曹正郞) 및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지제고(知制誥)를 거쳐 1520년(중종 15) 동부승지, 이듬해 좌우부승지(左右副承旨)․장례원 판결사를 역임하여, 1527년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발탁되었으며, 1528년 정조사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530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형조 참판(刑曹參判), 이듬해 호조 참판(戶曹參判)․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거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역임한 뒤 1533년(중종 28) 형조․호조의 판서에 올랐다. 1534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고향에 물러나 있다가 병사했다.

최수성(崔壽城) 1487(성종 18)~1521(중종 16) 자(字)는 가진(可鎭), 호(號)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생원 세효(世孝)의 아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조광조(趙光祖)․김정(金 淨)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구하여 사림(士林)간에 명망이 높았고, 시문․서화․음률․수학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뛰어났다.

1915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동지들이 처형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명산을 유람하다가 1521년(중종 16) 신사무옥(辛巳誣獄)때 간신들의 모함으로 죽음을 당했다. 후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강릉(江陵)의 향현사(鄕賢祠)와 보은(報恩)의 고봉사(孤峰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최기벽(崔基鐴) 1573(선조 6)~1645(인조 23) 자(字)는 자근(子勤), 호(號)는 매곡(梅谷), 매창공(梅窓公) 세절(世節)의 증손(曾孫).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1613년(광해군 5)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이이첨(李爾瞻)의 심복들이 여론을 조작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을 상소하자, 반대하다가 당시의 세도가 이이첨의 미움을 받고동생 기백(基銆)과 함께 성균관에서 퇴관당하여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향리 원주(原州)로 내려가 살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억울함이 풀렸다. 1176년(숙종 2)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최기백(崔基銆) 매곡(昧谷) 기벽(基鐴)의 동생. 1623년(인조 원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書藝)를 역임하였다.

최문발(崔文發) 1607(선조 40)~? 호(號)는 취석(醉石), 매곡공(梅谷公) 기벽(基鐴)의 세째 아들. 세속의 명리(名利)를 초탈하여 시(時)․주(酒)와 더불어 일생을 보냈으며 그가 남긴 시(時)를 모아 후손들이 취석시집(醉石詩集)을 만들었다.

최문식(崔文湜) 1610(광해군 2)~? 자(字)는 정원(正源), 호(號)는 성헌(省軒), 참판 세절(世節)의 현손(玄孫), 기벽(基鐴)의 아들, 1630년(인종 8) 문과(文科)에 급제, 1638년(인조 16)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持平), 1667년(현종8) 장령(掌令), 1674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이해 숙종이 즉위하자 사간(司諫)으로 승진,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고 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예조 참판(禮曹參判)․도승지(都承旨)․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후사를 역임한 후 1679년(숙종 5) 다시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흔봉계(欣奉系)>

최식봉(崔式奉) 고려조(高麗朝)에 호장(戶長)을 지냈다.

최봉례(崔奉禮) 고려조(高麗朝)에 창정(倉正)을 지냈다.

최충서(崔忠恕) 고려(考慮)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최숙(崔 叔) 고려조(高麗朝)에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최입지(崔立之) 조선조(朝鮮朝)에 문하평리(門下評理)․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최안소(崔安沼) 조선조(朝鮮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강릉군 (江陵君)에 봉해졌다.

최안빈(崔安瀕) 조선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최안면(崔安沔)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유의(崔有漪)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사광(崔斯廣) 조선(朝鮮)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고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최운기(崔雲起) 조선조(朝鮮朝)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이(崔 迤) 1356(공민왕 5)~1426(세종 8) 초명(初名)은 원(遠), 자(字)는 유명(惟明), 시호(諡號)는 희경(僖景). 강릉군(江陵君) 유련(有璉)의 아들. 도평의 지인(都評議知印)에 초임(初任)된 후 1380년(우왕 6) 낭장(郎將)으로 규정(糾正)을 겸하고 지정선군사(知旌善郡事)를 거쳐 교주도 안렴사(交州道按廉使)가 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

이어 판도전법 총랑(判圖典法摠郞)․감문비순위 대호군․삼사 유윤(三司右尹)을 지내고, 이듬해 삼사 좌윤(三司左尹)으로서 방원(芳園 : 태종)의 심복이 되어, 1392년(공양왕 4)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오르고 조선 개국 후 중추원 우부승지(中樞院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1394년(태조 3)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승진, 이듬해 경기좌도도관찰사 겸 병마도절제사, 1397년 완산부윤(完山府尹), 1400년(정종2) 중군 총제(中軍摠制)에 이어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대사헌을 겸했다. 1402년(태종 2)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가 되었고, 1404년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이듬해 공조 판서․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 1406년 왜구(倭寇)의 침범이 잦자 특히 충청도 병마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에 보직되었다.

1408년 길주도 도안무사(吉州道都安撫使), 이듬해 영진주목사(領晋州牧使), 1412년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형조 판서를 지내고 다음해 공조 판서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평양부윤(平壤府尹)을 겸임, 이어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호조 판서를 역임했다. 1420년(세종 2) 경라 태종이 죽자 재기용되어 진향사(進香使)로 다녀와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랐다.

최수(崔 修) 조선조(朝鮮朝)에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최경인(崔景仁) 조선조(朝鮮朝)에 감사(監司)를 역임하였다.

최한보(崔漢輔) 조선조에 수찬(修撰)을 역임하였다.


<문한계(文漢系)>

최극림(崔克霖) 호(號)는 혜재(惠齋)․도계(道溪). 고려조(高麗朝)에 음사(蔭仕)로 용인 현령(龍仁縣令)을 역임하였다.

최온(崔 溫) 고려조에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를 역임하였다.

최윤(崔 允) 고려조(高麗朝)에 음사(蔭仕)로 사포서 사포(司圃署司 圃)를 역임하였다.

최자옥(崔自沃) 조선조(朝鮮朝)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453년(단종 1)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으나 그후 관직에 물러나여생을 보냈다.

최자호(崔自湖) 자(字)는 안경(安卿), 직장(直長) 윤(允)의 아들. 1449년(세종 31) 의금부 필추(義禁府畢推)․내유사 서제(內需司書題)를 거쳐 1454년(단종 2)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최자점(崔自霑) 자(字)는 자흡(子洽), 호(號)는 괴헌(槐軒). 1465년(세조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겨, 1472년(성종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였고,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최세건(崔世楗) 자(字)는 가첨(可瞻), 호(號)는 안곡(安谷). 조선 중종조(中宗朝)에 음사(陰司)로 보안도 찰방(保安道察訪)을 역임하였다.

최진(崔 津) 자(字)는 여원(汝源). 조선조(朝鮮朝)에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역임하였다.

최의(崔 漪) 자(字)는 의지(漪之).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情大夫)로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를 역임하였다.

최항(崔 沆) 자(字)는 항지(沆之). 조선 중종조(中宗朝)에 선무랑(宣務郞)으로 정선훈도(旌善訓導)를 역임하였다.

최관(崔 灌) 자(字)는 관지(灌之). 조선(朝鮮)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최해(崔 瀣) 자(字)는 해지(瀣之). 조선조(朝鮮朝)에 충순위 소위장군(忠順衛昭威將軍)을 역임하였다.

최연(崔 演) 자(字)는 연지(演之), 호(號)는 간재(艮齋), 시호(諡號)는문양(文襄). 조선 중종조(中宗朝)에 사마시(司馬試)에 선임(選任)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성균관 제학(成均館提學)․한성 판윤(漢城判尹)을 거쳐 인조조(仁祖朝)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고 좌찬성(左贊成) 겸 대제학(大提學)에 증직(贈職)되었다.

최담(崔 澹) 자(字)는 담지(澹之). 조선조(朝鮮朝)에 교수(敎授)를 역임하였다.

최옥(崔 沃) 자(字)는 옥지(沃之), 호(號)는 성재(誠齋). 조선조(朝鮮朝)에 승문원 편수관(承文院編修官)․부정자(副正字)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재감 부젗(司宰監副正)을 역임하였다.

최순(崔 洵) 자(字)는 순지(洵之).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최백소(崔伯沼) 자(字)는 치영(致靈). 조선조(朝鮮朝)에 마전 군수(麻田郡守)를 지냈다.

최운기(崔雲起) 자(字)는 인중(寅中), 호(號)는 수옹(睡翁). 조선조에 동부 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하였다.

최운서(崔雲瑞) 조선조(朝鮮朝)에 직장(直長)을 지냈다.

최운부(崔雲溥) 자(字)는 대중(大中). 조선 선조조(先祖朝)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호당(湖堂)에 선임되었고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예문관 편수관(藝文館編修館)․봉교(奉敎)에 이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최운광(崔雲廣) 조선조에 음사(蔭仕)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역임하였다.

최운흘(崔雲屹) 자(字)는 입중(立中), 호(號)는 삼휴당(三休當)․지수(芝峀). 1567년(명종 22) 군자감 소윤(軍資監少尹)․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1571년(선조 4) 군기시정(軍器寺正)을 역임하였고,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다.

최운영(崔雲嶸) 자(字)는 성중(盛中), 호(號)는 사가당(四佳當)․지곡(芝谷). 조선 선조조(宣祖朝)에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최문(崔 汶) 자(字)는 자경(子敬). 조선조(朝鮮朝)에 통례원 직장(通禮院直長)을 거쳐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최대윤(崔大潤) 조선조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천 군수(通川郡守)를 지냈다.

최상홍(崔尙弘) 조선조(朝鮮朝)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최경성(崔景成) 자(字)는 덕립(德立).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 軍)으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최경검(崔景儉) 자(字)는 응필(應弼), 호(號)는 익재(益齋). 1589년(선조22)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선무랑(宣務郞)으로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를 지내고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어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예빈시정(藝賓寺正)을 역임하였다.

최경준(崔景壚) 자(字)는 미백(美伯), 호(號)는 영매헌(暎梅軒). 조선조에 음사(蔭仕)로 봉사(奉事)를 거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최경찬(崔景瓚) 자(字)는 미숙(美叔), 호(號)는 해옹(海翁). 조선 때 음사(蔭仕)로 별제(別提)를 지내고 장사랑(將士郞)에 올랐다.

최충남(崔忠男) 자(字)는 신부(藎夫). 조선조에 판결사(判決事)에 증직(贈職)되었고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최경남(崔慶男) 자(字)는 길부(吉夫). 조선조(朝鮮朝)에 음사(蔭仕)로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최지남(崔智男) 자(字)는 회부(晦夫). 조선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