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선산곽씨시조,곽우현,선산곽씨조상인물,곽은(郭垠)

작성일 : 2017-12-22 16:24 수정일 : 2018-03-03 16:41

곽씨 성의 득성유래

거금 3000년 전 주나라 주문왕의 동생인 목이 괵성(괴성)지역을 하사 받아 살면서 곽씨성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산곽씨의 유래

시조 곽우현은 호가 서천공이며, 고려 은청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 겸 태자첨사로 봉 선산군하여 선산곽씨의 시조가 되시었으며, 곽우현은 고려 8대 현종(서기1010- 1031년)때 인물로 현종 13년(임술-서기 1023년)년에 고려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에 오른 무송인 유방의령서이시다.

무송인 유방은 무송유씨 시조인 고려태종(왕 건)때 벽상공신삼중대광에 오른 개국공신 유검필의 손자이시며, 고려사절요에 열 번이나 기록되신 분이다.


씨족사 개요

선산곽씨종중은 고려 8대 현종때인 서기 1022년경에 시조이신 서천공 (곽우현)께서 씨족을 이루신 이래, 고려조에서는 명문거족으로 크게 공명을 떨쳐 왔으나, 이성계가 고려를 정벌할 때 10세조인 고려 문과 삼사좌윤 곽 유원공께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시며, 태종(이성계)의 거듭된 회유에도 충절을 지키시다가 (누등소부에 불부하고), 세종 무신(1428)년에 종마하셨다.

죽은 뒤에도 고려관명으로 지석을 묻고 평장후 자손은 묘소에 접근하지 말라시는 유지를 지키다가, 150년 뒤 발견된 지석은 공의 묘소 앞에 세워져 있는바 역사적 사료 가치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외손송우암선생은 (위연대절) 이라고 칭송 하였으나 조선조 500여년 동안 후손들은 조선개국에 반대한 유원공의 전통 을 이어받아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려조중신들은 조상을 버리고 이름을 바꾸거나 첩첩 산중에 은거하며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으며, 1960년대 이후 전국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종친회라는 종중단체는 오랜 관행에 따라 옥천을 중심으로 집성촌에서 대를 잇고 있다. 따라서 서울 등 대도시에는 오늘날까지도 별도의 종중모임이 없는 실정이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산곽씨는 전국에 8,325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주요인물 - 선산곽씨조상인물

선산곽씨시조 곽우현 호 서천공 성현록에 의하여 고려 은청광록대부 문하시중평장사 겸 태자첨사로 봉 선산군하여 선산곽씨의 시조가 되시었고, 묘는 경기 장단(당시 개성인근)북쪽 우근촌 건달산에 있으며, 고려 8대 현종때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 유 방의 령서이시다.

2세 곽숭 - 문과 명경과 장원으로 봉선대부 태자첨사를 지냈다. 묘는 상동임.

3세 곽원 - 고려 의종 7년 문과 장원으로 상장군참지정사를

4세 곽희 - 고려 문과 정순대부태자태보

5세 곽보견 - 고려 문과 문림랑수문전학사로 제술갑과 1인이며,

6세 곽영전 - 고려 문과 봉익대부병부상서로 제술과 장원이다.

7세 곽해  - 도염서령이시고,

8세 곽연 - 고려 문과 정순대부태자태보이며

9세 곽윤성 - 고려 문과 급제후 제술과 장원으로 봉익대부예의판서 겸 동지밀직사이며

10세 곽순원 - 문과 사재령이고

곽돈원-문과 상저도사이며

곽유원- 고려 문과 중정대부삼사좌윤 이시다.

곽유원 고려 문과 중정대부삼사좌윤으로 고려가 패망할 때,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 은거하여 선산곽씨씨족을 이룩한 사실상의 중시조임. 고려가 패망할 때 두형중 한분과 옥천의 구룡촌으로 오셨으나 형님의 생사는 알 수가 없고, 공의 아들 4형제(순.규.장.기) 중에서도 장남(순)과 삼남(장)의 후손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개국초기에는 역신으로 몰려서 상당한 박해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왕씨의 신하로써 결코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공의 충절이야말로, 이후 선산곽씨의 종중전통이 되어, 오늘날에도 선곽의 후손들은 개인의 출세영달을 위한 아부와 타협보다는 옳은 일에는 결코 굽히지 않는 씨족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후 삼족지죄와 부관참시를 면하기 위하여 묘는 평장을 하였고, 고려관명으로 쓴 지석을 묘앞에 묻어서 훗날 후손들이 알아볼수 있도록 하였고, 150여년 후인 1570년경 공의 증손자인 진사공 지한의 외손인 밀성박씨 여경의 묘를 만들때에 공의 지석이 발견 되었으니, <삼사좌윤 곽유원지묘>라고 각자 되어 있어, 이후 후손들이 봉분을 축성하면서 진정한 공의 묘소가 되었다.

장남 순은 세종 정미년(142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행통훈대부황간현감을 지낸후 사간원의 대사간을 지냈으나 후사가 없었으며, 3남 장은 문과 급제후 경상도사를 지냈으나 역시 후사가 없다. 다만 2남 규는 태종 갑오(1414)년 급제하여 신창현감을 지냈고, 4남 기는 세종 신미년(1441년)에 성균관 생원을 지냈다.

곽규 삼사좌윤공의 차자로 태종 갑오(1414)년에 문과 갑과 급제후 통정대부신창현감 겸 홍주진관병마절제도위로 선산곽씨 종파인 현령공파의 계보를 이루었다.

곽우 신창현감공 곽 규의 아들로 선무랑전성서 주부를 지냈으며, 전라 운량사 재임시봉적하여 장남 지양과 동순하였다.

곽은(郭垠) 삼사좌윤공의 4남인 생원 기의 자로 호는 용촌. 자는 안부임.

조선조 성종3년 (임진 1472년)에 급제한후 , 사헌부 지평과 장령을 거쳐 전남 담양부사로 재직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며, 점필제(김종직)와 만든 “보포기”라는 장학제도는 이후 수백여 년 동안 호남인들의 인재양성에 기여 해오고 있으며,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 하였으나 부임치 못하고 순절하심에, 인근 백성들은 마치 부모상을 당한 듯이 3일동안 곡을 하였으며, 담양인근에는 그후 3년간 고기와 술을 파는 보부상의 발길이 끊겼다고 하며, 목민심서에도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다.

대사성 신자승이 외증조로,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와는 처남매부가 되고, 숙종36년(1710년 경인)에는 옥천 창주서원에 봉향 되었고, 헌종6년(1840년)에는 담양 연동사에 봉향 되었다가 해방후 훼철 되었으나, 담양지역 유림에서는 현재도 담양 향교에서 매년 향사를 올리고 있다. 슬하에 3남을 두어 장남 진사 지한은 선산곽씨 진사공파를 이루었고, 차남 만호지병은 어 장군적량수군만호로 만호공파를 이루었으며, 삼남 지정은 생원으로 생원공파를 이루었으니, 오늘날 선산곽씨 종원의 90%이상이 공의 후손이다.

 

곽지겸 고려 삼사좌윤공 유원의 차남인 규의 자 우의 아들로 호는 익재공이다.

옥천.구룡촌 본가에서 태어나 통정대부문의현령 겸 청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냈고, 문의현령으로 계실때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주고 학문을 권장 하며 시서를 읽게 하고, 백성들의 폐단을 철폐하며 몸소 솔선. 선정을 베푸시어 조정의 칭송을 받았고, 인종때에는 청백리로 뽑혔으며, 옥천 구룡촌본가에서 시거 회덕하여 선곽의 종파인 현령공파를 이루었다.

곽연성 문의현령 익재공 지겸의 아들로 자는 국번이요 봉정대부 행 군자감주부로 선조 임진란파천에 태자 광해군을 호위하는 감무군사로 임진강을 건너다가 왜적의 칼을 맞아 순직하였다. 공의 사위 이 선은 참봉으로 율곡의 큰형임.

곽시 고려 문과 중정대부삼사좌윤공 유원의 현손이며 선곽 13세조인 진사공 지한의 4남으로 자는 영이이고 호는 탄암이다. 연산조7년 신유(서기 1501년)에 태어나 22세때인 중종 임오시에 진사급제 하였고, 1534년(갑오) 초시에서는 왕도론이라는 시제는 간신의 아첨이라며 붓을 던지고 나왔고, 1537년(정유) 과장에서는 간신 대제학 김안로에 아첨하는 권관 심통원의 방해로 낙방 하였으나, 김안로가 패사한 중종34년 기해별시에 급제하였다. 학문이 출중하였고 공의 글은 문리가 자통하고 성리의 원에 따랐으며, 공이 지은 과책론은 중종조에 입선이 되었고, 당대 대유학자인 모재 김안국, 박문수, 박춘형, 박유경등이 칭송하는 시를 지었으며, 현재도 시 9수와 함께 탄암문집으로 전해진다.

친구인 하서 김인후는 “공의 인품 부럽도다 구룸속 학같은 그대, 내모습이 부끄럽다 유물밑 개구리같네“ 라고 부러워 하였고, 소세양. 오 건. 조 헌등도 공을 칭송했다.

광해 13년(1621년)에 옥천 향인들은 삼계서원에 탄암공 곽 시선생과 중봉 조헌선생, 옥천인 송정 전팽령을 함께 봉향하였으나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33년후인 효종 갑오(1654)년 훼철 되었다가, 숙종 기묘(1675)년 영동 양산 삼양서원에 복향되었으나 숙종 경인(1680)년 또다시 훼철이 되었고, 숙종20년 (경술-1694년)에는 옥천읍 삼청리 후손의 집성촌에 삼청사를 지어 재복향 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옥천지역 유림들에 의하여 매년 3월 초정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2002년 이후부터는 옥천군청에서 향사비용중 절반을 보조받고 있음)

곽자방 13세조이신 성균관생원 지정의 3남인 언의 자로써, 세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무과관봉사로 임진란당시 중봉 조헌선생의 휘하로 청주대첩등 많은 전투에서 왜적을 무찔렀고, 금산전투에서 조헌장군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셔서 윤문정공 근수 발의로 순절비를 세오고 이후 금산 칠백의총에 모셔졌으며, 매년 9월 문공부에서는 향사를 올리고 있다. 공의 사후 선조는 공의 집을 복원하라 명하였고, 인조때에는 공의 집 앞에 문각을 세워 표창하였다. 공의 사위는 은진송씨 송갑조로 우암송시열선생의 부친이니, 공께서는 우암의 외조부가 되신다.

곽종간 성균관진사로 자는 직경이요 호는 오물재이다. 연성의 5대손으로 대전광역시 대화동에서 선곽종파인 현령공파의 사손으로 우암 송시열선생에게 글을 배웠으며, 어린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학문에만 전념하며 오물재라는 정사에서 오로지 후학 수재제자들 훈육에만 평생을 바쳐 칭송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