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8(의종 22)-1241(고종 28). 초명은 인저(仁fr),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 居士) · 지헌(止軒) ·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시호는 문순(文順), 호부(戶部) 낭중(郞中) 윤수(允緩)의 아들.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文 科)에 금제, 1199년 전주사록가 되고, 1202 년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1207년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사재승(司宰丞) · 우정언(右正言) . 지제고(知制話)를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陳)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한 것으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부사(副使)에 좌천당했다. 1220년 예부(禮部) 낭중(郞中) · 기거주 · 지제고(知制話)에 승진, 국자(國子) 제주(祭酒) · 한림 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의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獨島)에 유배, 1232년 판비서상사 · 보문각(寶文閣) 학사(學士) 경성부(鏡城府) 우첨사(右待事) · 지제고에 올랐다. 이듬해 호부(戶部) 상서(尙書) · 집현전(集賢殿) 대학사 (大學士) ·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고, 1237년 금자광 록대부(金紫光祿大夫) ·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士)했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으로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 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卽興詩)로 유명했고, 몽고군의 침입을 진명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로, 시 · 술 ·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