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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염씨] 염정수(廉廷秀)

작성일 : 2017-10-27 12:11

중시조 제신(悌臣)의 셋째 아들로 호는 청강(淸江) 혹은 훤정(萱庭)이며 1371년 문과에 급제, 특히 문필(文筆)에 능달(能達)하고 시문(詩文)에도 능했으며 학문이 높았다. 1383년 지신사(知申事)때 국자감시(國子監試)로 시관이 되어 우홍명(禹洪命) 99명의 인재를 뽑았고, 한때 전주(銓注)를 맡았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의 제도를 따르자고 했다. 벼슬은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영록대부 우문관대제학 사헌부대사헌(榮祿大夫 右文館大提學 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으나 무진(戊辰)년에 피화(被禍)되었고 묘()가 함경도 단천에 있다고 전한다.

중시조의 세 아들 국보, 흥방, 정수(國寶 興邦 廷秀)는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학문(學文)이 높아 문형(文衡)에 이르고 정승(政丞)의 반열에서 나라에 동량(棟樑)이었다. 그러나 고려말에 쇠퇴(衰退)하는 국운(國運)에서도 끝내 나라를 중흥(中興)코자 했으나 이성계와 최영 등의 신군부(新軍部)의 혁명세(革命勢)에 떠밀림으로써 동정공(東亭公)이 부정축재(不正蓄財)를 했다는 누명을 쓰고 무진(戊辰 1388) 정월에 이성계와 최영 등에 의해 다섯 가문 친.인척 1천여 명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 사실은 그들 혁명세력(革命勢力)이 지은 고려사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조선 중기(中期)이전부터 그 학살의 부당성을 양식이 있는 학자들은 인정하고 신원(伸寃)의 당위성(當爲性)을 역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現代)의 일부 학자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외면하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무진년(戊辰年)이후 염씨들은 더 이상의 화()를 피해 옛날부터 모여 정들어 살던 고향 파주(坡州)를 떠나 전국 각지로 몸을 피해 숨어살며 조선시대에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려 말 호족(豪族)들에 대한 반목도 약해지고 또 나라에 위기가 왔을 때인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벙자호란(丙子胡亂)때는 일족이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거하며 적을 물리치는데 공()이 많았다. 그 중에도 간혹 일가들은 출사(出仕)는 안했어도 향리(鄕里)에 공헌하고 부모에 효성(孝誠)을 다하여 정려(旌閭)될 때 증직(贈職)되는 경우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