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10-26 13:38
1548 (명종 3) ~ 1622 (광해군 14) 자(字)는 백구(伯懼) 호(號)는 일송(一松) 수뢰누인(水雷累人)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정자(正字) 건(鍵)의 아들. 노수신(盧守愼)의 문인. 1568년(선조 1) 성균관에 입학 1570년 이 황(李 滉)이 죽자 성균관 대표로 제사에 참여했고, 1572년(선조 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다. 1583년(선조 16) 사가독서(賜暇讀書)했고 1589년 헌납(獻納)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려다 조정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직하였다가 이듬해 부응교(副應敎)로 등용, 1591년 응교(應敎)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 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으로서 수차 직언을 하다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司成)으로 전직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왕을 호종(扈從)했다. 그때 마침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중국어에 능통하여 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어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영접했다. 이해 겨울,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접반사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맞았고, 1597년 대사헌(大司憲), 1599년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겸임, 우찬성(右贊成)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1606년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여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정권을 장악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右議政)에 전임,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의 신원을 상소했다가 사형을 당하게 된 정 온(鄭 薀)을 구하여 유배에 그치게 했다. 1615년(광해군 7)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이듬해 명나라에 다녀온 허 균(許 筠)이 중국 야사(野史)와 와전된 우리 종계(宗系)를 시정했다고 보고하여 조정에서 축하연(祝賀宴)의 개최 여부가 논의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축출, 둔지산(屯之山)에 들어가서 독서와 시로써 소일했다. 상주(尙州) 봉암사(鳳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 일송집(一松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