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10-23 14:41
1866년(고종 3) ~ 1951년. 군수(郡守) 광효(光孝)의 아들. 전남 보성(寶城) 출생. 7세에 상경하여 외숙(外叔)인 판서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 1879년(고종 16) 13세에 전강(殿講)에 장원했다. 이때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의 선진적 개화 인사들과 교유, 1883년(고종 20) 일본 도오꾜오 육군유년학교(東京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후 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調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이해 김옥균․홍영식(洪英植)․서광범 등과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병조 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족은 역적이라 하여 체포령이 내리자 부모․형․처는 음독자살, 동생 재창(載昌)은 참형, 2살된 아들은 아사(餓死)하였다.
미국 유학 중 미국에 귀화, 펜실베니아주의 웩스바레 중학교를 다니고, 1888년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워싱턴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졸업 후 가아필드 병원에서 세균학을 연구, 미국인 암스트롱과 재혼하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했다.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고 내무대신 유길준(兪吉濬)에게 교섭, 정부 예산 5천원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또한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출국이 강요되어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3.1운동 때까지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독립만세 운동을 전해 듣고 잡지 「이브닝 레저」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 친구회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 후원회를 만들었다.
1919년 겨울부터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와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외교 위원장의 자격으로 필라델피아에 사무실을 두고 활약, 1922년 워싱턴의 군축 회의(軍縮會議)에 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의 370여 단체가 서명한 연판장을 돌렸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 규탄했다.
독립운동으로 가재(家財)가 파산에 이르자 다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강의하고 여러 병원의 의사로 있었다. 1947년 미 군정장관하지 중장의 초청을 받고 귀국, 과도 정부 최고 정무관(政務官)이 되었다가 1948년 미국에 가서 여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