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10-23 14:35
1859년(철종 10) ~ 1897년(광무 1). 자(字)는 서구(叙九), 호(號)는 위산(緯山), 사시(私諡)는 익헌(翼獻), 참판 상익(相翊)의 아들.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된 뒤 대교(待敎)․승지(承旨)․참판(參判)을 역임, 1882년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도일(渡日), 문물제도를 살피고 정치개혁을 계획했다.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을 중심한 개화독립당(開化獨立黨)의 소장 정치인들과 함께 집권층인 사대당(事大黨)의 제거를 획책하고, 1884년 우정국 사건(郵政局事件)의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가담, 개화당 내각이 수립되자 좌우영사(左右營使) 겸 대리 외무독판(代理外務督辦)․우포장(右捕將)이 되었으나 내각이 사흘 만에 와해되자 일본에 망명했다.
1894년의 갑오경장(甲午更張) 후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법부 대신(法部大臣)이 됐으나 진로파 및 사대수구파(事大守舊派)와 대립했다. 그들의 압력으로 주미공사로 부임, 임지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