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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 성혼(成 渾)

작성일 : 2017-08-29 13:26

1535 (중종 30) 1598 (선조 31)  ()는 호원(浩原), ()는 우계(牛溪)․묵암(黙庵),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수침(守琛)의 아들. 17세 때 감시(監試) 초시(初試)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복시(覆試)를 못치르자 과거(科擧)를 단념, 백인걸(白仁傑) 문하에서 경학(經學) 연구에 정진했다. 선조(宣祖) 초에 학행으로 참봉(參奉)․현감(縣監)․지평(持平) 등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580년에는 장령(掌令) 직을 굳이 거절하고 마교(馬轎)를 타고 상경하라는 우례(優禮)까지 받았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右參贊)에 오르고 1594년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러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일찍부터 이 이(李 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 황(李 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지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하는 이 이와 1572(선조5) 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이 이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儒學界)의 큰 화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 이의 문인인 조 헌(趙 憲)․한 교(韓 嶠)․황 신(黃 愼)․이 귀(李 貴)․정 엽(鄭 曄) 등이 그의 문인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 죽은 뒤 반대파들에 의해 한때 관작(官爵)을 추탈당했다가 인조 초에 복관(復官),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