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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 성세창(成世昌)

작성일 : 2017-08-29 12:18

1481 (성종 12) 1548 (명종 3)  ()는 번중(蕃仲), ()는 돈재(遯齋), 화왕도인(火旺道人), 시호(諡號)는 문장(文莊), 판서(判書) ()의 아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이심원(李深源)에게 역학(易學)을 배웠으며, 당대의 일류 재사들과 교유했다.

1501(연산군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아버지와 함께 영광(靈光)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로 임명되었다.

1507(중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고,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나서 집의(執義)․사간(司諫)․천문 예습관(天文隸習官)을 거쳐 1519(중종14)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1522년 다시 기용되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고 이듬해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성(大司成)․이조참판(吏曹參判)․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부제학(副堤學)이 되었다.

1530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를 논척(論斥)하다가 도리어 평해(平海)에 유배되었으나 1537(중종 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풀려 나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공조 판서(工曹判書)․우참찬(右參贊)을 역임, 이어 현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副提學)을 겸했다.

그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判書)를 지내며 대제학(大提學)을 겸임, 1544(중종 39) 호조 판서에서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545(인종 1)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우의정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갓다가 돌아오는 도중 좌의정이 되었다. 이해 을사사화로 중추부(中樞府)의 한직(閑職)에 좌천, 이어 장연(長淵)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문장에 뛰어나 당시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많은 외교 문서를 썼고, 글씨․그림․음률(音律)에도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으며, 모간본(摸刊本)으로 「돈재필적(遯齋筆蹟)1권이 전해지고 있다. 1567(명종 22) 관직이 복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