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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 성현(成 俔)

작성일 : 2017-08-29 12:09

1439 (세종 21) 1504 (연산군 10)  ()는 경숙(磬叔), ()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시호(諡號)는 문대(文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의 아들. 1462(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했다.

박사(博士)로 등용된 뒤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 수찬(藝文館修撰)․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을 겸하고 형 임()을 따라 북경(北京)에 갈 때 도중에서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이라 했다.

1474(성종 5) 지평(持平)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와 1476년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堤學)․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동부승지(同副承旨)․우승지(右承旨)․형조 참판(刑曹參判)․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1488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조서를 가지고 오는 명나라 사신 동 월(董 越)과 왕 창(王 敞)의 접대연(接待宴)에서 서로 시를 주고 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케 했으며, 이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493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으나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던 그가 외직으로 나감으로서 불편이 많아지자 한 달만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이해 류자광(柳子光) 등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여 음악을 집대성했고, 한편 관상감(觀象監)․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 거기에 딸린 관원을 이전대로 문무관의 대루를 하게 했다.

연산군(燕山君) 즉위 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공조 판서로 대제학(大提學)을 겸했다. 죽은 후 수 개월 만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류자광(柳子光)․어세겸(魚世謙)과 함께 왕명으로 고려가사(高麗歌辭)「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을 산개(刪改)하고, 저서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초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면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글씨를 잘 썼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