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8-28 14:35
1497 (연산군 3) ~ 1579 (선조 12) 자(字)는 사위(士偉), 호(號)는 휴암(休庵),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개시(改諡)는 문경(文敬), 왕자 사부(王子師傅) 익견(益堅)의 아들, 인호(仁豪)의 아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금강산에 입산, 그후 돌아와 153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成均 館)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檢閱)․예조 좌랑(禮曹佐郞)․남평 현감(南平縣監)․호조 정랑(戶曹正郞)․지평(持平)․헌납(獻納)을 역임했다. 1545년(명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 (小尹)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다시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와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하다가 윤원형이 죽자 복직, 1567년(명종 22) 71세의 나이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宣祖) 때 직제학(直提學)․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 同知義禁府事)를 겸임, 다시 대사헌이 되어권신(權臣)들을 논핵하다가 사임했다.
1578년(선조 11)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서 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논하고 군비 강화를 강조했다. 선조 때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났다. 남평(南平)의봉산서원(蓬山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