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의 휘(諱)는 치도(致道) 자(字) 성유(聖由) 호는 죽천재(竹泉齋) 숙종병자(肅宗丙子) 十二월 九일생 문학(文學)과 덕망(德望)이 一세에 중앙(衆仰)되었다. 녹천 이영상유허(鹿川李領相濡許)가 크게 쓰일 재목이라 칭(稱)하였고 참판 이우(參判李?)가 우리고을 안자(顔子)라 칭(稱)하였다. 경오에 생진양시(生進兩試)를 맞으시고 태학관장의(太學管掌議)로 많은 활약(活躍)하시면서 강경한 상소(上疏)로 윤명재(尹明齋)를 구(求)하려다가 당인(黨人)들의 화를 입어 관직(官職)을 버리시고 죽남산중(竹南山中)에 은거(隱居)하시여 교수불권(敎授不倦)하고 훌륭한 문인(門人)을 많이 양성(養成)하였고 명철한 학행(學行)으로 자주 도신수이계(道臣繡衣啓)에 들었다.
우리 가문은 죽천재공활동(竹泉齋公活動)으로부터 소론(少論)의 명문(名門)이 되었다. 죽천재는 성격(性格)이 강직(剛直)하고 논리(論理)가 투철하여 세인(世人)들이 경탄하였고 한때 송우암(宋尤岩)을 十八현정에서 제명(除名)할 때 선구자역할(先驅者役割)을 하면서 조출일귀하니 쾌재쾌재(快哉快哉)라 지은 시(詩)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영조계사(英祖癸巳) 七월 二十七일 졸(卒)하니 문집(文集) 三권이 있고 태학관장의(太學館掌議)로 재직(在職)시 수집한 귀중(貴重)한 필첩 七권이 있다.
아들 득좌(得佐)의 귀(貴)로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호조참판겸(戶曹參判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을 하였다. 호암안정택(湖岩安政宅)이 죽천재기(竹泉齋記)를 짓고 노하 임정헌 용성 양주익(魯下林廷憲 龍城梁周翊)이 행장(行狀)을 짓고 명현서첩서(明賢書帖序)를 손상희(孫相禧)가 짓고 중재김황(重齋金榥)이 묘갈명(墓碣銘)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