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8-22 16:42
공의 휘는 윤중(允中)이고 자는 공신(公信)이고 휴암은 그 호 이다. 중군사정 휘 정(靜)의 5대손으로 고조의 휘는 호우 (孝友)이신데 교수(敎授)를 하셨으며, 증조의 휘는 호(浩)인데 생원(生員)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처정(處楨)인데 참봉(參奉)을 하셨고, 아버지의 휘는 홍(洪)인데 참봉(參奉)을 하셨다.
어머니 진원최씨(珍原崔氏)는 현감 윤(崙)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바탕이 달라, 내실(內實)에 힘쓰고 독학(篤學)하여 종족들은 그 효도를 칭찬하고 향당에서는 그 학문을 스승으로 하였다. 거듭 천섬(薦剡)에 올랐으나 벼슬은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에 그쳤다.
임진년, 섬 오랑캐가 변란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파월(播越)하실 때 호종(扈從)하였고 정유년에 벼슬을 그만두시고 귀향하였는데 왜적의 무리 수천명이 갑자기 닥치니 드디어 스스로 맹세하시기를 『힘이 없고 형세(形勢 고단(孤單)하여 집 뒤 암혈(巖穴)에 숨으면 충분히 몸은 가릴수 있을것이나 만약 왜적을 한 명이라도 죽이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를 구할 수 있겠느냐!』하고는 집의 젊은이들 200여명을 거느리고 출전한지 수일에 결국에는 대강(大江) 가운데 휴암(?巖) 아래서 죽었으니, 바로 9월 18일 이었다.
이 때에 운홍(雲虹)의 기적(奇蹟)이 있었다. 공의 부인 함풍성씨(咸豊成氏)는 감찰 기인(起仁)의 따님인데 공을 뒤따라 물속으로 몸을 던지면서 말하기를, 『공이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선무랑(宣務郞) 형윤(亨胤)이 또 이어서 순사(殉死)하려고 하자, 며느님인 서씨(徐氏)가 자신이 대신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부자가 모두 죽으면, 조상 제사는 누가 받들며, 후사(後嗣)는 누구에게 맡기란 말입니까?』하고는 드디어 제기(祭器)를 안고 강에 투신(投信)하여 죽었다.
난리뒤에 시신(屍身)을 건져올렸는데, 서씨(徐氏)가 떨어진 곳은 하류(下流)였는데, 거슬러 올라가서 시부모님 곁에 있었으니 그 또한 기적(奇蹟)이었다. 고종황제 임진년에 이르러 태상(太常= 諡號를 관장하는 官廳)에게 명하여 임진왜란 때에 충신 효자 열녀[忠孝烈]로서 행실이 남달리 뚜렷하였는데도 아직 포상(褒賞)을 받지 못한 사람을 널리 찾아서 보고하라고 하였었다. 그것을 담당하였던 신하가 공(公)과 성씨(成氏), 서씨(徐氏)에 대한 일을 들어가 보고하니, 공에게는 이조참의(吏曹參議), 성시(成氏)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이 증직되고 아울러 삼강정려(三綱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공(公)은 망암선생(望菴先生)의 종제(從弟=사촌동생)이니 망암(望菴)이 화차(火車) 삼백량(三百輛)을 만들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자의 조달을, 공(公)이 가산(家産)을 기울여 도았으니, 바로 행주대첩(幸州大捷)은 공의 공(功)이 또한 적지 않다.
판서 조종필(趙鍾弼) 참판 박봉빈(參判 朴鳳彬),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등의 정려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