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8-22 10:55
(1368~1446) 초명. 희종(熙宗), 자. 자인(子仁), 호. 위남(葦南), 감무 온(溫)의 아들, 1393년(太祖 2)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401년(太宗 1) 문과(文科)에 급제, 환로(宦路)에 오른 이후, 이조병조 정랑(吏曹 兵曹 正郞), 1416년(太宗 16)에 동궁(東宮; 世宗) 서연관(書筵官)을 지냈고 예문관(藝文館) 지제교(知製敎) 겸(兼)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註官)을 역임하였으며 해동필원(海東筆苑)에 올라 명필(名筆)로 칭송(稱頌)을 받았고, 하윤린(河允潾; 河崙 先親)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기도 하였다.
전농시윤(典農寺尹)으로 있을 때 일본국(日本國) 회례사(回禮使)로 국위(國威)를 선양(宣揚)하고, 명(明)나라에 조선(朝鮮)건국의 승인(承認)을 받으려고 사신(使臣)으로 다녀왔으며 1423년에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제수(除授)되었고, 특히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 修築때 경차관(敬差官)으로서 공사를 완성, 그 업적(業績)에 감탄(感歎)하여 백성들이 그 공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1426년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고 1429년 결연(決然)히 진원(珍原) 땅에 귀향하여 위남어수(葦南漁叟)라 자호(自號)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으며 청백전가(淸白傳家)의 가훈(家訓)을 남겨 지금까지 종훈(宗訓)으로 이어오고 있으며 공(公)은 사후(死後)에 학림사(鶴林祠; 장성군 진원면)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