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8-07 13:59
1329 (충숙왕16) ~ 1398 (태조 7) 초명은 익첨(益瞻),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시호(諡號)는 충선(忠宣), 숙선(淑宣)의 아들. 강성현(江城縣) 출신. 1360(공민왕 9) 문과(文科)에 급제, 김해부 사록(金海府史錄)․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내고 1363년 좌정언(左正言)으로 서장관(書狀 官)이 되어 계품사(計稟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이 해 최 유(崔 濡) 일파가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이에 가담, 귀국후 파직 되었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고향에 재배, 뒷날 한국의 의료(衣料) 및 경제상(經濟上) 커다란 공헌을 했다.
1375(우왕1)다시 전의 주부(典儀主簿)로 등용되고, 1389년(창왕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으며, 공양왕(恭讓王) 때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 준(趙 浚)의 탄핵을 받아 사직, 낙향하여 은거(隱居) 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9년간이나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고, 이태조(李太祖)가 친히 물렀으나 굳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효행(孝行) 또한 지극하여 왕(王)의 특명으로 효자비(孝子碑)가 세워지고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을 효자리(孝子里)라 명명(命名)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도 밝았다.
태종(太宗)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강성백(江城伯)에 봉해지고 부조묘(不祧廟)를 세웠으며, 1440(세종 22)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부민후(富民侯)에 추봉(追封)되었다. 남평(南平)의 장연서원(長淵書院), 산청(山淸)의 도천서원(道川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