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일 : 2017-08-07 13:57
? ~ 1392 (태조 1) 시호(諡號)는 충익(忠翊), 평장사(平章事) 극겸(克謙)의 후손. 우왕(禑王) 때 대호군(大護軍)이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때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이 되었으며, 지문, 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1388년(우왕 14)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양광․경상도 도체찰사(陽廣慶尙道都體察使)로 나갔다.
이때 왜구 1천여 명이 옥주(沃州)․보령(保寧) 등지를 함락,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하는 등 계룡산(鷄龍山) 일대를 노략질하자, 왕안덕(王安德)․도 흥(都 興)․김사혁(金斯革)․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이를 공격하여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대파했다.
후에 사소한 사건으로 우왕의 비위에 거슬려 삭직(削職), 오랫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가 최 영(崔 瑩) 등의 노력으로 복직, 다시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어 추충익대 보조공신(推忠翊戴輔祚功臣)의 호를 받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그 후 외척을 빙자하여 탐학이 심하다는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합포(合浦)․철원(鐵原) 등지에 유배, 곧 방환(放還)되어 삼사 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의 즉위초 이 임(李 琳)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다. 그후 풀려 1392년(태조 1)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다. 김제(金提)의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