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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맹씨] 맹사성(孟思誠)

작성일 : 2017-08-07 11:38

1360 (공민왕 9) 1438(세종 20)  ()는 자명(自明), ()는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한성부윤(漢城府尹) 희도(希道)의 아들. 양촌(陽村) 권근(權 近)의 문인.

1386(우왕 12)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춘추관 검열(例文春秋館檢閱)을 거쳐 전의승(典儀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수원 판관(水原判官)․내사사인(內史舍人)․예조 정랑(禮曹正郞)․시어사(侍御史)․간의(諫議)를 지내고, 1400(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었다.

1406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이듬해 진전사(進箋使) 시종관(侍從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고, 1408년 대사헌(大司憲)으로 왕에게 알리지 않고 왕의 사위 조대림(趙大臨)을 국문(鞫問)한 것이 태종(太宗)의 노염을 사서 한주(韓州)에 유배되었으나, 영의정(領議政)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곧 풀려 나왔다.

그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416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승진, 이어 호조․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고 1419(세종 1)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겸했다.

1425년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문신(文臣)으로는 최초로 삼군 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1427년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다.

1429년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고, 이듬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감수(監修), 1431년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이듬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를 겸하여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에 찬진(撰進)하고, 1435년 치사(致仕)했다.

황 희(黃 喜)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높아 정승으로 있으면서도 집에 비가 새고, 고향에 다닐 때 남루한 차림으로 행차하여 그곳 수령(守令)이 잘못 알아보고 야유했다가 나중에 알고 도망하다 관인(官印)을 못에 빠뜨려 후에 그 못을 인침연(印沈淵)이라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 하여 스스로 악기를 제작했다.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효자정문(孝子旌門)도 세워졌으며, 아산(牙山)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