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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박씨] 박문수(朴文秀)

작성일 : 2017-07-05 16:22

1691 (숙종 17) 1756 (영조 32)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시호는 충헌(忠憲), 항한(恒漢)의 아들. 1723(경종 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이듬해 설서(說書)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가 1724(영조 즉위) 노론(老論)이 집권할 때 삭직(削職)되었다.

1727년 정미 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少論)이 기용되자 사서(司書)에 등용, 영남 암행어사(嶺南暗行御史)로 나가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사로도순문사(四路都巡問使)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拔擢)되고,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730년 참찬관(參贊官)에 이어 호서 어사(湖西御史)로 나가 기민(飢民)들의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에 진주부사(陳奏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고 1737년 도승지(都承旨)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지냈다.

이듬해 다시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다녀와 앞서 안동서원(安東書院)을 철폐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 부사(豊德府使)로 좌천당했다가, 1741(영조 17) 어영대장(御營大將)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와서 기민을 구제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이듬해 병조 판서(兵曹判書), 1743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이듬해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 1749년 호조판서가 되어 양역(良役)의 폐해를 논하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다시 좌천되었다. 그 후 영남 균세사(嶺南均稅使)를 거쳐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판의금부사(判義禁副使)세손 사부(世孫師傅)를 지내고, 1752년 왕세손(王世孫)이 죽자약방 제조(藥房提調)로 책임을 추궁 당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다. 이듬해 풀려 나와 우참찬(右參贊)에 올았다. 특히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았고, 암행어사때의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