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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송씨] 송희립(宋希立)

작성일 : 2017-06-27 14:53

()는 삼규당(三規堂)이며 참의(參議) 송대립(宋大立)의 아우이다. 선조조(宣祖朝)에 사마(司馬)()에 입격(入格)하여 진사(進士)가되었다. 뜻한 바 있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서기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지도중중 이순신 막하에서 활약하엿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려오는 왜수군(倭水軍)을 감당하지 못한 원균(元均)이 전라(全羅)우수사(右水使) 이순신(李舜臣)에게 원병(援兵)을 요청(要請)해 이순신은 제장(諸將)논의(論議)하는데 모두의 주장(主張)은 이 상황(狀況)에 관내(管內)도 방어(防禦)하기 힘드는데 영남(嶺南)진영(鎭營)까지 구원(救援)할 수 없지 않느냐며 반대(反對)하였다. 그러나 공만이 의분(義憤)에 넘처 주장하기를 영남(嶺南)이라고 우리 왕토(王土)가 아니겠는가 즉시(卽時) 출진(出陣)하여 적()의 선봉(先鋒)을 꺾어 버려야 우리 진영(鎭營)도 보전(保全)될 것이요라고 왜쳤다. 이순신은 공의 의견이 내 뜻과 같다고 하시며 전군(全軍)을 출동(出動)하여 한산도(閑山島)에서 원균(元均)과 합류하여 거제도 앞 바다의 대해전에서 수십(數十) ()가 넘는 적()의 선단(船團)을 좌충우돌(左衝右突)하여 적을 무찔러 모조리 수장(水葬)시키는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공은 대전(大戰) 때마다 신기(神奇)한 전략(戰略)으로 충무공이 연전연승(連戰連勝)토록 보좌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우리 수군(水軍)이 완전(完全)히 장악하였다. 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최후(最後) 전투(戰鬪)인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적()의 총탄(銃彈)에 맞았으며 이 전투(戰鬪)에서 이순신도 전사(戰死)하였다. 공은 빈사(瀕死)상태(狀態)에서 일어나 이순신의 전사(戰死) 사실(事實)을 감추고 군기(軍旗)와 북채를 잡아 독전(督戰)하여 승리(勝利)를 거두고 나서 발상(發喪)하여 고향(故鄕) 아산(牙山)으로 반장(返葬)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최후(最後)의 전투(戰鬪)에서 승리(勝利) ()는 송희립(宋希立) 장군(將軍)이다. 사백(舍伯) 송대립(宋大立)과 함께 선무원종1등공신(宣武原從1等功臣)에 책록(策祿)되고 후 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주청(奏請)으로 전라(全羅)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고 왕()의 유서(諭書)를 받았다. 제동서원(齊洞書院)과 순천(順天) 충무사(忠武祀) 광주(光州)의 무광사(武光祀)에 배향(配享)되고 상무(尙武)()에 동상(銅像)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