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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안창호(安昌浩)

작성일 : 2017-06-26 15:42

1878(고종 15)1938 ()는 도산(島山), 안흥국(安興國)의 아들. 평남 강서(江西) 출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 1895년 상경하여 1897년 구세학당(救世學堂)을 졸업하고 조교(助敎)로 있으면서 예수교에 입교하는 한편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다. 1899년 강서(江西)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고, 1902년 도미(渡美), 초등학교를 다닌 후 이듬해 이산(離散)된 재미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공립협회(共立協會)를 만들었다. 1907년 귀국,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민족 각성 운동을 전개,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웠으며,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기관지로 사용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과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세웠다. 1909(융희 3)에는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이동녕(李東寧)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결성하고 이듬해 북경(北京)을 경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유럽을 거쳐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1912년 미국에서 해외동포를 총망라한 대한인 국민총회(大韓人國民總會)를 조직, 총회장에 선임되고, 이듬해 로스앤젤레스에 청년학우회의 후신으로 흥사단(興士團)을 결성했다. 31 운동 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 노동 총판을 역임하며「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했고, 흥사단 극동 임시위원부를 만들어 임시정부 육성과 민족계몽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1년 분열된 임시정부 내각통일에 힘쓰다가 실패하자 인책사직(引責辭職)하고 이듬해 서울에다 수양동지회(修養同志會)의 결성을 지시, 1923년에 국민대표회가 결렬 된 후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을 결성하여 이상촌(理想村)의 건설을 계획했다. 1925년 다시 미국에 돌아가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고 이듬해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군 단체의 행동 통일을 토의하던 중 중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928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여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선언하고 이듬해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대전(大田)에서 66개월 동안 옥고를 치룬 뒤 가출옥하여 대보산(大寶山)에 들어가 휴양하다가 1937년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동우회(同友會)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듬해 병보석(病保釋)되어 경성대학병원에 입원중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