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4(충숙왕 11)~1394(태조 3) 자(字)는 사청(嗣淸), 호(號)는 쌍청당(雙淸堂),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축(軸)의 아들. 17세에 문과(文科) 급제, 검열(檢閱)․삼사 도사(三司都事)를 거쳐 공민왕(恭愍王) 초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여 칭송을 받았고,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나갔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이 피난하여 죽주(竹州)에 이르렀을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서 관민(官民)이 도망쳐버린 책임으로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에 좌천되었다. 뒤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에 승진했으나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신 돈이 처형된 뒤에 다시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왕(禑王) 초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서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류 구(柳 玽) 등과 더불어 환관(宦官)들의 횡포를 시정하려고 노력했다. 이어 대사성(大司成)․우상시(右常侍)․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판숭경부사(判崇敬府使)가 되어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이어 문하평리 겸 대사헌(門下評理兼大司憲)에 순성보조공신(純誠輔祚功臣)이 되고, 뒤에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 순성익대보리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이 되었다. 최영(崔瑩)에 의해서 청렴(淸廉)으로 발탁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가 곧 사임,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이듬해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에 피봉(皮封)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영삼사사(領三司事), 이듬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지내고, 1394년(태조 3)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